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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가족 보복 살해, 전쟁범죄 기록에서 지워지다 [松山칼럼ㅣ종북 좌파 80년사 ⑩]
  • 松山 시인
  • 등록 2026-02-08 15:4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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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0~51 횡횡한 국군·경찰 가족 보복 살해
  • 종북 좌파, 전쟁 범죄를 역사 밖으로 밀어내

 인민재판을 받고 있는 경찰의 모습. 인민위원회는 인민재판을 통해 군경과 그 가족들을 학살했다.

1950년 6월25일 전쟁이 시작되자 무너진 것은 전선만이 아니었다. 

 

행정과 치안이 먼저 붕괴했다. 국군과 경찰이 후퇴한 자리에는 인민군 점령이 들어왔고, 각지에 인민위원회가 조직됐다. 내무서, 분주소, 자위대, 치안대 같은 이름의 강제 집행 조직이 빠르게 만들어졌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화위) 역시 점령기 지역 통치가 인민위원회와 내무서 중심으로 작동했다고 설명한다. 통치의 공백은 오래 비어 있지 않았다. 공백은 곧 다른 권력으로 채워졌다.

 

인민위, 국군과 경찰 가족 마구잡이로 학살

 

이 과정에서 ‘보복 살해’의 표적이 정해졌다. 국군과 경찰 “본인”을 붙잡지 못하면 가족을 잡았다. 아버지, 어머니, 아내, 아이, 형제까지 한 묶음으로 끌고 갔다. 

 

이유는 “경찰 집안” “국군 집안”이라는 딱지였다. 개인이 실제로 무슨 일을 했는지, 구체적 범죄가 무엇인지 따지지 않았다. 가족관계 자체가 죄목이 되었다.

 

명단이 돌았고, 인솔자가 있었고, 공개 처형 형식을 취한 곳도 적지 않았다. 잡아갈 때는 밤이 많았고, 끌고 가는 장소는 주로 공회당, 학교, 내무서 유치장, 하천변, 방공호, 골짜기였다. 

 

산 채로 묻거나, 총살하거나, 둔기로 때려 죽였다. 시신 수습을 막는 경우도 흔했다. 이건 전투가 아니었다. 민간인을 겨냥한 정치 살해였다. 권력이 사람을 겁주기 위해 가족을 골라 죽이는 방식이었다.

 

전남 장흥군 대덕면 가학리. 1950년 9월9일, 보안서원과 인민위원회 간부들이 이국빈의 집을 급습했다. 그의 아들 이대진(1909년생)을 공회당으로 끌고 갔다. 

 

현장에서 책임자가 주민들 앞에서 “아들과 동생이 경찰이라 반동 집안”이라고 말했고, 곧바로 총살이 이뤄졌다는 보도와 증언 기록이 남아 있다.

 

“무슨 범죄를 했는가”는 묻지 않았다. “경찰 가족”이라는 낙인이 전부였다. 이 만행은 그날 장흥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같은 논리가 인근 지역들에서도 반복됐다.

 

서울 점령 직후 상황을 보여주는 기록도 존재한다. 1950년 7월8일자 자료에는 “한국 경찰은 중산계급을 형성했다”는 취지의 선전물·방송 문구가 등장한다. 경찰을 ‘계급의 적’으로 규정하고 대중의 적개심을 끌어올리는 선동이었다.

 

현장에서 벌어진 일은 잔혹했다. 경찰관 본인이 체포·처형되고, 이어서 가족에게 폭력이 이어졌다. 

 

이 일련의 과정은 “전시의 혼란”이라는 말로 정리될 수 없다. 표적화, 체포, 처형 또는 실종이라는 절차가 반복됐기 때문이다. 절차가 반복되면 우발이 아니다.

 

경기 북부 파주 사례를 보면 패턴은 더 명확해진다. 1950년 9월26일경 인민군과 지방 좌익이 주민을 내무서로 끌고 가 감금했고, 9월30일 적성면 두포리 전진교 앞 방공호에서 두 손이 묶인 채 총살된 사건이 진화위 자료에 기록돼 있다. 

 

윗 사례들은 개별 사건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구조는 같다. “끌고 간다, 묶는다, 죽인다.” 이 조합이 여러 지역에서 반복되었다.

 

1951년 9월13일 밤, 57사단 공비들은 “악질 반동분자”라는 선고를 내린 후 20명의 경찰관을 죽창과 낫으로 학살했다.  

한국전쟁기 민간인 피해에 대해서는 남한 정부가 전쟁 중과 전후 여러 차례 조사했다. 공보처는 1950년 9월 서울 중심 피해를 조사했고, 1952년 1차, 1953년 2차 전국 조사가 진행됐다.

 

조사 과정과 그 한계에 대해서는 정병준의 한국전쟁사 연구가 비교적 상세히 정리하고 있다. 

 

물론 전쟁 직후와 전후 혼란기 속에서 이루어진 조사였기 때문에, 개별 희생자 명부가 어떤 기준과 절차로 작성되었는지를 완전히 복원할 수 있는 행정 문서가 충분히 남아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이 때문에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숫자와 세부 항목의 정확도를 일률적으로 판정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그러나 적대세력, 즉 인민군·지방좌익·유격대에 의한 희생이 대규모로 존재했고, 그 안에는 경찰·공무원 등 국가 협력자로 낙인찍힌 사람들과 그 가족이 포함된다는 사실 자체는 흔들리지 않는다.

 

진화위가 확인한 사건 유형만 봐도 그렇다.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 사건”은 별도 범주로 분류돼 전국 각지 사례가 축적돼 왔다. 언론 보도 역시 이를 반복 확인한다. 

 

2024년 4월 진화위가 “북한군·좌익세력에 의해 종교인 1700명 규모의 희생”을 진실규명했다고 밝힌 보도가 있었다. 전남 영암 등지에서도 인민군과 지방좌익에 의한 민간인 희생 사건에 대해 진화위가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전쟁기의 폭력은 한쪽 국가 권력만 저지른 것이 아니다. 북쪽과 남쪽의 좌익 점령·유격 세력도 민간인을 조직적으로 살해했다. 특히 “국군·경찰 가족”은 공포 효과가 커 표적이 되기 쉬웠다. 한 집안을 뿌리째 자르면 동네는 며칠 만에 입을 다문다. 공포 통치는 이렇게 작동한다.

 

누가 이 죽음을 “없는 것”으로 만들었는가

 

이제 총의 문제가 아니라 펜의 문제다. 누가 방아쇠를 당겼는가가 아니라, 누가 그 죽음을 기록에서 지웠는가의 문제다. 이 역할을 수행한 집단은 종북 좌파 지식인들이었다.

 

점령지에서 벌어진 경찰·국군 가족 살해는 이들의 글 속에서 다른 이름으로 바뀌었다. “지역 갈등” “보복” “좌우충돌” “전시의 비극” “해방 공간의 대립” 같은 표현이 반복 사용됐다. 이 말들은 가해 주체를 지우기 위해 동원됐다.

 

인민군, 지방좌익, 보안서원, 인민위원회라는 실제 작동 주체는 문장에서 빠지고, 감정적이고 추상적인 단어만 남는다. 이렇게 쓰면 책임이 사라진다. 책임이 사라지면 가해자는 이름을 잃고, 피해자는 사건을 잃는다. 재판도, 배상도, 추모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종북 좌파 지식인들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전쟁기 폭력의 비중을 의도적으로 뒤집었다. 그들의 서술에서 핵심은 언제나 “국가 폭력”이었다. 보도연맹, 예비검속, 형무소 재소자 학살은 반복적으로 조명됐다. 연구와 기념, 교육으로 이어졌다. 

 

인민군과 지방 좌익에 의한 민간인 살해는 같은 밀도로 다뤄지지 않았다. 경찰·공무원 가족이 표적으로 살해된 사건들은 늘 뒤로 밀렸다. 이유는 비슷했다. “자료 부족” “확정 곤란” “판단 유보”. 이런 말들은 사실상 면죄부였다.

 

진화위 조사 과정에서도 이 차이는 드러났다. 군경 가해 사건과 적대세력 가해 사건은 입증과 보상 구조에서 다르게 취급됐다. 

 

조사 과정에서 가해 주체가 군경으로 잘못 접수됐다가 적대세력으로 정정된 사례가 다수 확인됐고, 이를 둘러싼 논쟁도 반복됐다. 그러나 사회적 관심은 여전히 한쪽에 쏠려 있었다.

 

그 결과는 종북 좌파 지식인들이 만든 서술 구조 속에서 피해자 위계가 형성됐다. 어떤 죽음은 국가적 기억이 되었고, 어떤 죽음은 개인의 불운으로 밀려났다.

 

북괴의 의용군 소집에 동원된 어린 학생들. 

이 과정에서 경찰·공무원 가족 유족은 침묵했다. 침묵은 자발적 선택이 아니었다. 말하면 손해를 봤기 때문이다. “경찰 집안”이라는 꼬리표는 오랫동안 불이익으로 작동했다. 취업, 혼사, 지역 관계에서 불이익이 뒤따랐다. 그래서 말하지 않았다. 아니, 말할 수 없었다.

 

이 침묵은 개인의 성향이나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말할 수 있는 공간이 이 사회에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식인과 언론, 출판과 교과서가 이 사건을 다루지 않으면, 피해 경험은 공적인 역사로 올라가지 못한다. 

 

기록되지 않은 사건은 국가의 기억이 되지 못하고, 개인의 기억으로만 남는다. 그러면 유족은 자신의 경험이 예외적 사건이라고 믿게 된다. 

 

장흥 1950년 9월9일 같은 날짜가 역사에 적히지 않으면, 유족은 “우리 집안만 겪은 일”이라고 생각하며 고립 속에 머물게 된다.

 

시간이 흐른 뒤에도 태도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종북 좌파 지식인들은 이 사건을 “쌍방 비극”이라는 말로 접었다. 가해와 피해를 한 문장에 넣어 모두를 피해자로 만들었다. 이 방식은 편하다. 그러나 진실을 제거한다.

 

경찰 가족이 이유 없이 끌려가 총살된 사건과 전투 중 교전 피해는 같은 범주가 아니다. 하나는 표적 살해다. 다른 하나는 전투 피해다. 이를 같은 무게로 다루는 것은 학문이 아니라 왜곡이다.

 

여기에 “불가피”라는 말이 덧붙는다. 좌익 보복 살해는 전시 상황의 격렬함으로 설명되고, 국가 폭력은 구조적 범죄로 규정된다. 

 

동일한 기준은 적용되지 않는다. 이중 잣대다. 이중 잣대가 굳어지면 피해자의 서열이 만들어진다. 어떤 죽음은 기념비를 얻고, 어떤 죽음은 이름조차 얻지 못한다.

 

마지막 수단은 “자료가 없다”는 말이다. 전쟁기 자료가 불완전하다는 사실은 맞다. 그러나 종북 좌파 지식인들은 이 불완전성을 조사 출발점으로 삼지 않았다. 종결 문장으로 사용했다.

 

자료가 없으니 다루지 않는다. 다루지 않으니 증언은 사라진다. 증언이 사라지니 자료는 더 줄어든다. 이 악순환 속에서 피해자는 다시 침묵하게 된다.

 

1950~1951년 국군·경찰 가족 보복 살해는 전쟁의 부산물이 아니다. 점령 권력이 민간인을 표적으로 삼아 공포를 주기 위해 실행한 정치적 살해다. 

 

장흥 1950년 9월9일 사건처럼 “경찰 가족이니 사형”이라는 말이 실제로 발화된 기록이 남아 있다. 진화위 자료와 언론 보도는 이런 유형의 적대세력 희생이 전국 각지에 존재했음을 반복 확인한다.

 

그럼에도 이 사건들이 역사 바깥에 머문 이유가 있다. 총을 든 가해자만이 아니라, 펜을 든 정리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종북 좌파 지식인들은 이 폭력을 지우는 역할을 수행했다. 그 결과 유족은 오래 침묵했고, 지역 사회는 입을 닫았으며, 피해는 기록되지 않은 채 늙어갔다.

 




◆ 松山 

 

시인이자 역사·철학 연구자. 이승만학당 이사를 역임했으며 현재 한국근현대사연구회 연구 고문, 철학 포럼 리케이온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시집 네 권을 출간했고 ‘후크고지의 영웅’을 공동 번역했다. 松山은 필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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