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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 비판 대신 소련을 ‘수정주의 국가’로 규정 [松山칼럼ㅣ종북 좌파 80년사 ⑬]
  • 松山 시인
  • 등록 2026-02-22 14:4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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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6년 소련 20차 당대회를 ‘배신’으로 규정
  • “흐루시초프는 수정주의자, 스탈린은 혁명의 수호자”로 남겨

1930년대 붉은광장에 모습을 드러낸 스탈린(왼쪽)과 젊은 흐루시초프. 1956년 2월14일부터 25일까지 모스크바 크렘린궁에서 열린 소련 공산당 제20차 당대회는 공산주의 역사에서 결정적 분기점이었다. 

 

이 회의 마지막 날인 2월25일 새벽, 당시 소련 공산당 제1서기였던 니키타 흐루시초프는 비공개 특별보고를 진행했다. 공식 명칭은 ‘개인숭배와 그 결과에 대하여’였다. 이 보고는 전 세계 공산주의 운동의 지형을 뒤집어 놓았다.

 

그가 비판의 대상으로 지목한 인물은 다름 아닌 이오시프 스탈린이었다. 

 

흐루시초프, 스탈린 비판했지만 제국적 통제는 유지

 

스탈린은 1924년 레닌 사망 이후 권력을 장악했고, 1930년대 대숙청을 통해 당·군·지식인을 대규모로 제거했다. 

 

1937~38년 대숙청 기간에만 수십만 명이 처형되었고, 강제수용소 체계인 굴라그로 보내진 이들은 수백만 명에 달했다. 제2차 세계대전 승리로 스탈린은 국제적 위신을 얻었지만, 내부 통치 방식은 공포 정치였다.

 

흐루시초프는 이 공포 정치의 실상을 당 내부 문서와 증언을 통해 공개했다. 문제는 단순한 지도자 개인의 도덕성이 아니었다. 공산주의 체제가 스스로 절대 권력을 어떻게 정당화했는지, 그 구조가 도마에 올랐다. 

 

스탈린 개인에 대한 숭배는 단순한 심리 현상이 아니라 권력 집중의 산물이었다.

 

이 연설은 처음에는 비밀에 부쳐졌지만 곧 동유럽과 서방 정보기관을 통해 확산됐다. 그 여파는 즉각 나타났다. 

 

1956년 6월 폴란드 포즈난에서 노동자 시위가 발생했고, 10월에는 헝가리 혁명이 일어났다. 헝가리 시민들은 다당제와 소련군 철수를 요구했다. 

 

결국 소련은 탱크를 투입해 진압했다. 스탈린을 비판했지만 제국적 통제는 유지한 것이다. 이 모순은 공산주의 운동의 근본적 긴장을 드러냈다.

 

“스탈린 비판은 혁명의 후퇴, 소련은 수정주의 국가” 

 

이제 한반도로 시선을 돌려보자. 1953년 7월 정전 이후 남북은 냉전 최전선에 서 있었다. 북한의 권력 구조는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빠르게 김일성 중심 체제로 재편됐다. 

 

흐루시초프 서기장이 모스크바를 방문한 김일성 주석을 맞이하고 있다. [사진=AP]

그런데 1956년은 북한 내부에도 격랑의 해였다. 이른바 ‘8월 종파 사건’이 발생해 소련파와 연안파 일부 인사들이 김일성의 개인 집중 권력을 비판했다. 그들은 흐루시초프식 집단지도체제를 요구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숙청이었다. 김일성은 이들을 제거하고 권력을 더욱 강화했다. 이후 북한은 ‘유일사상체계’로 나아갔다. 유일사상체계란 김일성이 생각하는 대로 사고하고, 가리키는 대로 행동하는 정신·행동 체계로 북한 조선노동당 건설의 기본 원칙이다.

 

스탈린 비판이 소련에서 제기된 바로 그 해에, 북한은 개인숭배를 제도화하는 방향으로 움직인 것이다. 역사의 아이러니라기보다 권력의 본성에 가까운 장면이다.

 

남한의 종북 성향 운동권도 이 흐름을 복잡하게 받아들였다. 1960년대 이후 일부 급진 세력은 소련을 ‘수정주의 국가’로 규정했다. 그들이 보기에는 스탈린 비판은 혁명의 후퇴였다. 이론을 수정하는 것이 아니라 혁명적 순수성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 것이다. 

 

이 과정에서 중국 노선이 대안으로 떠올랐다. 1966년 시작된 문화대혁명은 청년층 급진 세력에게 강렬한 상징이 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여기 있다. 1956년은 공산주의 체제 내부에서 오류를 인정한 첫 공식적 순간이었다. 사상은 현실의 실패 앞에서 자신을 점검할 기회를 얻었다. 

 

그런데 종북 좌파는 이를 “배신”으로 규정했다. 교리를 보완하는 대신, 교리의 강도를 높였다. 논리적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경험적 사실을 밀어낸 것이다.

 

유연성 잃은 사상은 스스로를 고립시킨다 

 

정치사상이 살아 있으려면 현실과 상호작용해야 한다. 실험이 실패하면 가설을 수정하는 것이 과학적 태도다. 그런데 실패를 외부 음모나 수정주의로 돌려버리면 사상은 닫힌 체계가 된다. 닫힌 체계는 내부 결속은 강화할 수 있지만, 외부 현실을 설명하는 힘은 약해진다.

 

1956년을 둘러싼 선택은 단순히 소련 내부 문제에 그치지 않았다. 동아시아 공산주의 운동의 방향, 특히 북한 체제의 성격을 굳히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북한은 탈스탈린화가 아닌 수령 절대화로 나아갔고, 이는 1972년 사회주의 헌법과 이후의 유일지도체계로 이어졌다.

 

종북 좌파의 역사에서 1956년은 불편한 연도다. 스탈린의 오류가 드러난 해이기 때문이다. 스탈린 체제가 저지른 대규모 숙청과 인권 탄압을 인정하면, 그 체제를 이상형으로 삼았던 노선의 정당성도 함께 흔들린다. 

 

그 결과 흐루시초프는 ‘수정주의자’가 되고, 스탈린은 여전히 ‘혁명의 수호자’로 남는다.

 

사상은 인간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 인간이 사상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1956년 모스크바의 회의장은 그 기준을 시험한 장소였다. 어떤 진영은 현실을 받아들이며 변화를 시도했고, 어떤 진영은 교리를 고수하며 폐쇄로 이동했다.

 

역사를 장기적으로 보면, 자기비판을 수용한 체계는 점진적 변화의 길을 모색한다. 자기비판을 배격한 체계는 점점 더 내부 단속에 의존한다. 1956년을 외면한 선택이 이후 수십 년의 정치적 방향에 어떤 흔적을 남겼는지, 냉정하게 돌아볼 필요가 있다.

 

이 장면은 단순한 과거 이야기가 아니다. 사상이 현실과 충돌할 때 어떻게 반응하는가 하는 문제다. 수정은 후퇴가 아니다. 수정은 생존 전략이다. 

 

1956년을 거부한 태도는 교리의 강도를 높였을지 몰라도, 사상의 유연성은 잃었다. 그리고 유연성을 잃은 사상은 결국 스스로를 고립시킨다.

 

역사는 때로 조용히 말한다. 진실을 마주할 기회는 여러 번 오지 않는다. 1956년은 그런 기회였다. 그 기회를 어떻게 다루었는지가 이후 70년의 궤적을 설명해 준다.

 




◆ 松山 

 

시인이자 역사·철학 연구자. 전 이승만학당 이사. 현 한국근현대사연구회 연구고문이자 철학 포럼 리케이온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시집 네 권을 출간했고, ‘후크고지의 영웅들’을 공동 번역했으며 역사심리학 해설서 ‘신화가 된 조선’(2026)을 펴냈다. 현재 자유주의 문화운동의 연구와 실천을 활발하게 이어가고 있다. 松山은 필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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