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8월 출옥 이후 신영복이 자신의 과거를 말하는 방식이 달라졌다. [사진=신영복 홈페이지]
1988년 8월 출옥 이후 신영복이 자신의 과거를 말하는 방식이 분명히 달라졌다.
출옥 이전까지 통일혁명당 사건은 철저히 정치 조직 사건으로 다뤄졌다. 수사와 재판의 초점은 어떤 조직이 있었는지, 그 조직이 어떤 노선을 가졌는지, 그리고 개인이 그 안에서 무엇을 했는지였다.
개인이 무엇을 느꼈는지, 어떤 고민을 했는지는 판단 대상이 아니었다. 법원이 본 것은 생각이 아니라 행동이었다.
개인의 ‘도덕적 판단’이 범죄사실 덮을 수 없어
1968년 8월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통일혁명당 사건 중간 수사 결과’는 이 사건을 ‘전위당 조직에 의한 체제 전복 기도’로 규정했다. 이 규정에 따라 재판이 진행됐다.
신영복은 1968년 체포돼 1969년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항소와 상고를 거쳐 형이 확정됐다. 그는 1968년부터 1988년까지 20년 20일을 복역했다.
이 기간 문제로 제기된 것은 그의 사상이나 내면의 동기가 아니었다. 통일혁명당 조직 안에서 맡은 역할, 조직을 유지하고 넓히는 데 관여했는지가 쟁점이었다.
판결문과 수사 기록에는 구체적인 행위가 나열돼 있다. 비합법 기관지 제작과 배포, 전위조직 규약의 공유, 하부 조직원 관리, 활동 결과의 상부 보고가 반복됐는지 여부가 판단 기준이었다.
회합이 언제 열렸는지, 누가 참석했는지, 어떤 문건이 압수됐는지도 기록으로 남아있다. 법원은 이 연결이 일정 기간 지속됐다고 보았다. 개인의 고립된 행동이 아니라, 조직의 일원으로 움직였다는 판단이었다.
출옥 이후 신영복의 설명은 이와 달랐다. 그는 통일혁명당이라는 명칭을 거의 쓰지 않았다.
대신 “양심”이라는 말을 앞에 놓았다. 북한 노선이나 전위당 이론에 따라 움직인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옳다고 느낀 판단에 따랐다는 설명이었다.
정치 조직의 활동이 아니라 개인의 도덕적 판단이었다는 식의 설명이었다. 이 말은 1987년 이후 정치범 석방과 복권이 이어지던 사회 분위기 속에서 빠르게 퍼졌다.
이 설명 방식이 자리 잡으면서 사건의 모습도 달라졌다. 조직은 뒤로 밀리고 개인만 남았다. 통혁당 관련자들이 역할을 나눠 움직였다는 사실은 희미해졌고, 한 사람이 감옥에서 고뇌했다는 이야기만 강조됐다.
책임의 성격도 바뀌었다. 조직 활동은 개인의 감정으로 바뀌었고, 정치 사건은 도덕적 이야기로 전환됐다. 이후 강연과 저술에서 이 방식이 반복됐다. 신영복은 점차 정치 사건의 피고인이 아니라 ‘시대의 아픔을 겪은 지식인’으로 받아들여졌다.
판결문은 감정의 기록 아닌 행위의 기록
그러나 판결문은 변하지 않았다. 판결문은 감정을 기록하지 않는다. 언제 체포됐는지, 어떤 행위가 문제였는지, 그 행위가 반복됐는지만 남긴다.
판결이 유지되는 한, 그 안에 적힌 행위도 함께 남는다. 이후의 해석이나 회고가 아무리 대중의 인기와 호응을 얻었다 할지라도 이 기록을 대체하지는 못한다.
통일혁명당 사건의 규모는 조직의 실재를 보여준다.
1968년 중앙정보부 발표 기준으로 검거 인원은 158명, 기소 인원은 73명이었다. 개인 몇 명의 일탈로 설명하기 어려운 숫자다.
이 과정에서 박성준(한명숙 전 총리 남편)이 핵심 인물로 지목됐다. 그는 1969년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약 13년을 복역해 1981년에 출소했다. 당시 사법부는 그의 행위를 단순한 동조가 아니라 조직 운영에 관여한 활동으로 판단했다.
2022년 8월 서울고등법원은 박성준에 대해 재심 무죄를 선고했다. 이유는 불법 구금과 강압 수사, 자백의 임의성 부재였다. 이 판결은 국가 권력의 위법성을 확인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그에 대한 무죄 선고가 1960년대 통일혁명당이라는 조직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수사의 불법성과 조직의 존재는 법리상 분리되는 문제였다.
1960년대 후반 대학가와 지식인 사회에서 이런 조직은 일상 공간을 통해 퍼졌다.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등 주요 대학의 서클 활동, 독서 모임, 합법 잡지 편집, 세미나, 다방 모임이 연결 통로였다.
겉으로는 합법 활동이었지만, 그 안에서 비합법 노선이 병행됐다. 이것은 당시 지하조직에서 흔한 방식이었다.
박성준의 활동 경로는 부인 한명숙으로 이어졌다. 한명숙은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징역 1년, 집행유예 1년, 자격정지 1년을 선고받았다.
이 사례는 조직 활동이 개인적 친분과 일상적 관계망을 통해 확산됐음을 보여준다. 정치 조직은 별도의 공간에서만 움직이지 않았다. 일상과 겹쳐 있었다.
공안범이 ‘우리 시대의 지성’으로 둔갑하다
출옥 이후 신영복은 성공회대학교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1998년 사회과학부 교수로 임용됐고, 2006년 정년퇴임 이후에도 석좌교수로 남았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표지와 책날개. [사진=햇빛출판사]
이 시점부터 그는 통일혁명당 사건의 당사자라기보다 ‘우리 시대의 지성’으로 불렸다.
그의 서체는 공공기관과 기업 로고에 사용됐고,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1998년 돌베개에서 출간돼 널리 읽혔다. 이 과정에서 조직과 노선의 문제는 거의 언급되지 않았고, 오로지 감옥과 성찰만이 강조됐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본래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 △20년 20일의 복역 △1988년 출옥이라는 흐름 안에서 읽혀야 한다. 이 연결이 빠지면, 그 책은 전혀 다른 인상을 남긴다.
신영복을 넬슨 만델라에 비유하는 말도 같은 흐름에서 나왔지만, 만델라가 수감 이후 제도를 바꾸고 권력을 내려놓았던 것과 달리, 신영복의 사건은 체제 전복과 북한 노선 문제와 맞물려 있었다.
한국 현대사에서 정치 사상범의 감옥 생활은 자동으로 진실을 보증하는 이력이 되곤 했다. 물론 불법 수사와 조직 활동은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 그렇다고 불법수사라는 외피를 내세워 조직활동을 감출 수는 없는 것이다.
신영복은 자신을 시대의 지식인으로 둔갑시키는데 감옥생활과 양심과 불법수사라는 언어를 교묘히 이용하고 다녔다. 그 결과 자신은 상징으로 남고 사건은 사라지게 하는 마술을 부렸다.
신영복을 정확히 이해하려면 화려한 문장이나 연설보다 먼저, 그가 어떤 행동으로 어떤 사건에 연루됐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 松山
시인이자 역사·철학 연구자. 이승만학당 이사를 역임했으며 현재 한국근현대사연구회 연구 고문, 철학 포럼 리케이온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시집 네 권을 출간했고 ‘후크고지의 영웅’을 공동 번역했다. 松山은 필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