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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과 통일혁명당’ ① 미화된 지성, 지워진 기록 [특별기고: 松山]
  • 松山 시인
  • 등록 2026-01-22 01:2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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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일성주의자로 출발해 통혁당 창당준비위원회 주도
  • 통혁당 주변인 아닌 ‘혁명전선’ 필진·행동가로 활약

신영복은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극적으로 재포장된 인물이다. 연합뉴스 사진 재구성

신영복(申榮福, 1941~2016)은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극적으로 재포장된 인물일 것이다. 

 

오늘날 그는 서예, 에세이, ‘성찰의 지성’이라는 이미지로 굳어있다. 실제로 소주 브랜드 ‘처음처럼’의 글씨, 국정원 원훈석의 서체, 대학 강단에서의 온화한 언설이 그를 설명하는 표식처럼 쓰인다.

 

신영복의 진실: 북한 대남 공작 조직 활동가

 

신영복은 1960년대 중반, 북한의 대남 공작 노선과 맞물린 지하 조직 통일혁명당의 활동 선상에 있었다. 

 

1964년 3월15일, 비밀 장소에서 열린 모임에서 통일혁명당 창당 준비와 기관지 ‘혁명전선’ 발간이 논의됐다. 이 자리에는 김종태(통일혁명당 서울시당 위원장), 김질락, 이문규, 그리고 신영복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이 남아 있다. 

 

해당 기관지는 김일성을 ‘민족의 태양’으로 칭하는 문구를 전면에 내세우며 주체사상을 노골적으로 표방했다. 

 

이 신문은 합법 출판물이 아니었다. ‘민족의 태양’ 운운도 제3자의 평가가 아닌 조직 내부 인사들이 직접 남긴 서술로 확인된다. 1989년 도서출판 대동이 펴낸 관련 자료집에는 이 대목이 비교적 상세히 수록돼 있다.

 

1968년의 이른바 통혁당 사건은 이 흐름의 결과였다. 신영복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돼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이후 20여 년을 복역했다. 

 

판결문에는 그의 역할이 단순 연루를 넘어 △대학가 조직과의 연결 △하부 조직 관리 △정기 보고 체계 △불온서적 제공 등의 구체적 내용이 문서로 남아 있다. 

 

1968년 11월 군사법정에서 열린 통일혁명당 사건 관련 피고인들. 왼쪽부터 신영복, 이영윤, 송준철, 신남휴. 이날 군 검찰은 신영복에게 사형을, 나머지 세 명에게는 징역 7~10년을 구형했다. 

그럼에도 2000년대 이후 신영복은 다른 얼굴로 나타났다. 1988년 출옥 뒤 성공회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제자들을 길렀고, 1998년 출간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베스트셀러가 되어 대중에게 널리 읽혔다. 

 

노회찬, 김제동 등 공적 발언력을 막강한 인물들이 그의 문장을 인용하며 존경을 표했다. 이 인용들은 대부분 문학적 감흥과 윤리적 성찰에 집중돼 있다. 

 

반면 1960년대의 조직 활동과 이념적 선택은 “시대의 상처” “과장된 수사” “누명” 같은 말로 포장되거나 아예 언급되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해명과 엄호도 반복됐다. 2006년 ‘한겨레21’에 실린 글에서는 신영복이 핵심 지도부를 몰랐다는 취지의 발언이 소개됐다. 

 

그러나 같은 시기, 비합법 기관지 ‘혁명전선’의 서술과 판결문, 그리고 통혁당 핵심 인물인 김질락의 수기 ‘주암산’은 조직의 성격과 보고 체계, 북한과의 연계를 분명히 적고 있다. 

 

특히 북한 대남 사업 책임 선상에 있던 허봉학의 이름과 김종태에게 지급된 △미화 7만 달러 △한화 3000만 원 △엔화 50만 엔의 공작금 기록, 1969년 7월10일 김종태 사형 이후 북한 내각이 수여한 금성메달과 국기훈장 제1급 같은 사실은 분명한 기록으로 남아 있다.

 

김일성주의자로 출발, 통일혁명당 창당준비위원회 주도

 

1964년 3월15일은 한국 현대사에서 거의 언급되지 않지만, 이후 수십 년간 반복적으로 왜곡·미화되는 한 인물의 출발점을 분명히 보여주는 날짜다. 

 

이날은 통일혁명당의 창당 준비가 내부적으로 공식화된 날로, 비밀 약속 장소에 모인 핵심 인사들이 조직의 성격과 노선을 합의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날 모임에는 김종태(당시 통일혁명당 서울시당 위원장), 김질락, 이문규 등이 참석했으며, 신영복 역시 현장에 있었다는 대목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모임의 핵심은 ‘당의 정체성’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조직을 단순한 학술 모임이나 토론 집단으로 규정하지 않았다. 

 

스스로를 “한국 혁명의 전위당”으로 정의했고, 그 전위의 사상적 근거를 분명히 했다. 그것은 북한에서 체계화된 김일성 주체사상이었다.

 

회의에서 논의된 사안은 구체적이었다. 당의 명칭, 행동 강령, 조직 구조, 그리고 대중 선전 수단까지 포함됐다. 

 

특히 주목할 부분은 ‘기관지’ 발간 논의다. 조직을 결속하고 외부로 사상을 확산시키기 위한 핵심 수단으로, 소규모 등사 인쇄물을 정기적으로 제작·배포하자는 제안이 채택됐다.

 

이 장면은 1989년 도서출판 대동이 간행한 통혁당 관련 자료집과, 이후 공개된 수기·증언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된다. 날짜, 참석자, 발언의 요지가 일치한다는 점에서, 사후에 조작되거나 과장된 서술로 보기는 어렵다. 

 

1964년이라는 시점도 중요하다. 이는 1968년 통혁당 사건으로 대대적 검거가 이루어지기 4년 전이며, 조직이 비교적 안정적으로 노선을 정립하고 활동이 확장되던 시기다.

 

“민족의 태양 김일성 장군”… ‘혁명전선’ 창간 선언문의 실체

 

이날 회의에서 결정된 기관지의 이름은 ‘혁명전선’이었다. 명칭 자체가 상징적이다. ‘전선’이라는 표현은 사상 투쟁과 정치 투쟁을 전제로 한 용어로, 당시 북한 노동당 문헌에서 반복적으로 사용되던 개념이다. 창간 선언문에는 그 사상적 뿌리가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선언문은 김일성을 “민족의 태양”으로 호칭하며, 그의 혁명사상을 구현하는 것이 당의 존재 이유라고 명시했다. 

 

이는 수사적 표현이 아니라, 북한 내부 문건에서 사용되던 공식적 찬양 어법과 동일한 구조다. 즉, 남한 내부에서 작성된 문서이지만, 언어와 사상 체계는 이미 북한의 정치 문법을 그대로 차용하고 있었다.

 

선언문에서 강조된 또 하나의 목표는 ‘각계각층 애국민중의 결속’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애국’은 대한민국 헌정 질서나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의미하지 않았다. 김일성주의에 입각한 ‘통일혁명’이 기준이었다. 

 

이들은 남한 사회를 자생적 개혁의 대상으로 보지 않았고, 혁명적 전환의 대상으로 규정했다. 선언문에 등장하는 “하나의 혁명전선” “통일혁명의 깃발” 같은 표현은 이후 통혁당 산하 조직 명칭과 활동 방식으로 그대로 이어진다.

 

‘혁명전선’은 외부 선전용으로 대량 배포된 신문이 아니었다. 철필로 긁은 등사판을 이용해 수십 부 수준으로 제작됐고, 조직 내부와 신뢰 가능한 대상에게만 전달됐다. 즉, 체제 비판을 가장해 과장된 표현을 쓴 것이 아니라, 내부 결속을 위해 솔직한 언어를 사용한 문서다.

 

한국에서 찍힌 김일성 주체사상 신문

 

‘혁명전선’의 의미는 단순한 지하신문 하나로 끝나지 않는다. 이는 한국에서 제작·유통된 최초의 김일성주의 계열 출판물 가운데 하나로 평가된다. 

 

이전에도 북한을 추종하는 개인적 메모나 학습 자료는 있었지만, 명확한 정치 조직의 이름으로, 김일성 혁명사상을 전면에 내세운 정기 간행물은 이 시점이 처음이다.

 

이 신문은 이후 통혁당의 조직 확장 전략과 직결된다. 대학가에는 합법적 외피를 쓴 잡지 ‘청맥’이 배포됐고, 그 이면에서는 ‘혁명전선’이 사상적 핵심을 담당했다. 

 

합법과 비합법, 공개와 비공개의 이중 구조다. 이러한 방식은 북한의 남한 혁명 노선에서 전형적으로 사용되던 전략과 일치한다.

 

1960년대 중반 남한의 대학생 수는 약 20만 명 수준이었다. 통혁당은 이 중 일부를 ‘핵심 활동가’로 조직화하고, 그 주변에 동조자를 확산시키는 방식을 취했다. 

 

수치는 크지 않았지만, 조직의 목표는 대중 정당이 아니라 ‘전위’였기 때문에 효율이 중시됐다. 소수라도 강하게 묶인 집단을 통해 사회 전반에 영향력을 미친다는 계산이었다.

 

이 흐름 속에서 신영복은 단순한 독자나 방관자가 아니었다. 그는 서울상대 재학 시절부터 관련 서클 활동에 깊이 관여했고, 이후 육군사관학교 교관으로 재직하면서도 학생·지식인 네트워크와의 연결 고리를 유지했다. 이러한 이력은 1968년 판결문과 수사 기록에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정리하면, 1964년 3월15일은 하나의 출발점이다. 신영복은 ‘뒤늦게 휘말린 지식인’이 아니라, 김일성주의를 출발점으로 삼아 정치적 활동을 시작한 인물이었다. 기록은 그 사실을 차분하게 보여주고 있다.

 

신영복의 위치: 통혁당의 ‘혁명전선’ 필진·행동가로 활약

 

신영복을 ‘주변인’으로 규정하려는 설명은 기록과 맞지 않다. 통일혁명당의 비합법 기관지 ‘혁명전선’에 남아 있는 문구와 사건 기록을 종합하면, 그는 조직의 핵심 의사결정과 선전 활동에서 일정한 역할을 수행했다. 

 

1964년 3월15일 비밀 모임에서 당의 성격과 기관지 발간 취지가 논의될 때, 김종태의 제안에 “전원이 찬성했다”는 대목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다. 내부 결속을 전제로 한 회의에서 ‘찬성’은 참여 의지의 표현이다. 그 자리에 있었고, 반대하지 않았으며, 이후 실제 행동으로 이어졌다는 점이 중요하다.

 

‘혁명전선’은 수십 부 규모의 등사 인쇄물이었다. 대중 선전용이 아니라 내부 결속과 제한적 확산을 위한 매체였기 때문에, 필진의 참여는 곧 신뢰와 책임을 뜻했다. 신영복의 이름이 필진으로 언급되는 대목은 단발성이 아니다. 

 

신영복이 조직의 정치 목표를 설명하고, 김일성 혁명사상을 한국 현실에 적용하는 문장을 작성하는 데 관여했다는 기록이 반복된다. 이는 ‘읽기만 했다’거나 ‘우연히 접했다’는 설명으로는 해명되지 않는다.

 

또 하나의 기준은 행동이다. 1966~1967년 서울 시내 대학가에서 벌어진 집회·시위 준비 과정에는 보고 체계가 존재했다. 

 

김질락에게 전달된 활동 보고에는 학생 조직화, 집결 시점, 구호 내용이 포함돼 있다. 대법원 판결문은 이 과정에서 신영복이 하부 조직 관리와 보고에 관여했음을 적시한다. 법원의 판결문에는 특정 시점, 특정 장소, 특정 행위가 나열된다. ‘주변인’이었다면 나오기 어려운 판결문장이다.

 

 



 

◆ 松山 

 

시인이자 역사·철학 연구자. 전 이승만학당 이사를 역임했으며 현재 한국근현대사연구회 연구 고문, 철학 포럼 리케이온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시집 네 권을 출간했고 ‘후크고지의 영웅’을 공동 번역했다. 松山은 필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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