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사람 정약용(오른쪽)의 목민심서는 선진 정치 체계에 맞지 않는 책이다. [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은행]
요즘 정치인들이 “목민심서를 늘 곁에 두고 읽는다” “공직자의 자세를 배우기 위해 밤마다 펼친다” 같은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장면을 볼 때마다 불쾌함을 넘어 역겹다는 느낌까지 든다.
고전을 존중해서라기보다 고전을 자기 포장을 위한 소품처럼 쓰는 태도 때문이다. 고전은 존경의 대상일 수는 있어도 이미지를 꾸미는 장식품은 아니다.
목민심서는 권력을 가진 사람이 스스로를 경계하라고 쓴 책이지, 권력을 쥔 채 착한 얼굴을 연출하라고 허락해 주는 면죄부가 아니다.
그런데도 많은 정치인들은 이 책을 읽는다고 말하면서, 정작 그 책이 전제로 삼은 시대와 한계, 그리고 오늘날에는 맞지 않는 구조적 문제는 외면한다. 고전을 입에 올리는 순간 스스로 더 도덕적으로 보일 것이라 믿는 태도, 바로 그 지점에서 위선은 시작된다.
목민심서는 선진 정치 체계에 맞지 않는 책
이런 위선은 우연이 아니다. 목민심서는 오랫동안 한국 사회에서 ‘착한 정치’의 상징처럼 소비되어 왔다. “백성을 사랑하라” “청렴하라” “욕심을 경계하라” 같은 문장들은 시대를 초월한 좋은 말처럼 반복 인용된다.
정약용 역시 늘 개혁가, 실학자, 민생을 생각한 사상가로 불린다. 이 과정에서 목민심서는 이미 검증된 ‘좋은 책’이 되었고, 그 책을 읽는다고 말하는 사람 역시 자연스럽게 ‘좋은 정치인’의 자리에 올라간다.
문제는 목민심서가 실제로 무엇을 말하는 책인지, 그리고 무엇을 말하지 않는 책인지는 거의 묻지 않는다는 것이다.
목민심서를 제대로 읽으려면, 먼저 이 책의 성격부터 분명히 해야 한다. 이 책은 민주주의 교과서도 아니고, 낡은 제도를 뒤엎자는 개혁서도 아니다.
가장 정확하게 말하면, 목민심서는 전근대 사회에서 지방 관리가 백성을 어떻게 다루고 관리해야 하는지를 정리한 행정 지침서다.
백성을 주인으로 세우는 책이 아니라, 백성을 잘 다스리는 법을 가르치는 책이다. 이 차이를 인정하지 않으면, 목민심서는 늘 필요 이상으로 높이 평가되거나 엉뚱하게 사용된다.
목민심서에 나오는 백성은 정치의 주체가 아니다. 백성은 언제나 보호해야 할 사람, 가르쳐야 할 대상, 불쌍히 여겨야 할 존재로 등장한다. 백성이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하며, 자신의 삶을 결정하는 개인으로 묘사되는 장면은 거의 없다.
정약용은 수령에게 백성을 사랑하라고 말하지만, 그 사랑은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시민에 대한 존중과는 다르다.
백성에게 권리가 있다고 말하지 않고, 스스로 선택할 자유가 있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대신 “백성은 가난하니 도와주어야 한다” “백성은 무지하니 가르쳐야 한다” “백성은 약하니 보호해야 한다”고 말한다.
겉으로 보면 따뜻한 말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는 분명한 위계가 깔려 있다. 수령은 보호하는 사람이고, 백성은 보호받는 사람이다. 수령은 판단하는 쪽이고, 백성은 판단을 받는 쪽이다.
혜촌 김학수(1919~2009) 화백이 그린 조선시대 ‘종로’ 모습. 혜촌선생기념관
이런 구조에서는 아무리 수령이 착해도, 아무리 좋은 뜻을 담고 있어도 백성은 끝내 정치의 주인이 될 수 없다. 사랑받는 대상일 수는 있지만, 권리를 가진 주체로 등장하지는 않는다. 이것이 목민심서가 가진 가장 큰 한계다.
목민심서의 문제의식은 언제나 사람에게 향한다. 지방 행정이 엉망이 되면, 그 이유를 제도에서 찾지 않는다. 수령이 욕심이 많아서 그렇고, 게을러서 그렇고, 공부가 부족해서 그렇다고 말한다.
그래서 해결책도 늘 비슷하다. 더 검소해져라, 더 성실해져라, 더 배우고 스스로를 단속하라. 다시 말해, 이 책은 시스템을 바꾸자는 책이 아니라 사람의 태도를 고치자는 책이다.
이런 사고방식은 조선 주자학 정치의 전형이다. 사회 문제를 구조의 문제로 보지 않고, 개인의 도덕 문제로 돌리는 방식이다. 이 방식에서는 언제나 같은 결론이 나온다. “나쁜 사람이 문제다” “좋은 사람이 오면 다 해결된다”.
하지만 역사는 이 생각이 얼마나 약한지를 수없이 보여주었다. 아무리 선한 사람이 권력을 쥐어도, 권력이 집중되면 문제는 반복된다.
근대 정치가 등장한 이유는 사람들이 갑자기 착해져서가 아니라, 착함에만 기대는 정치는 오래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목민심서는 이 지점까지 나아가지 못한다. 권력을 조심해서 쓰라고 말할 뿐, 권력을 나누거나 제한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 차이는 매우 크다. 절제는 개인의 마음에 기대지만, 제한은 제도를 바꿔야 가능하다. 근대 정치는 후자를 선택했지만, 목민심서는 끝까지 전자에 머문다.
경제를 바라보는 시선에서도 이런 전근대성은 분명하다. 목민심서에서 백성이 부자가 되는 일은 언제나 경계의 대상이다. 재물이 많아지면 사치해지고, 사치해지면 도덕이 무너진다고 본다. 그래서 수령은 백성이 지나치게 부유해지지 않도록 살펴야 한다고 말한다.
이 관점에서 부는 발전의 결과가 아니라 관리해야 할 위험이다. 욕망은 억제돼야 하고, 질서는 위에서 내려와야 한다고 본다.
이런 생각에서는 개인의 선택이나 시장의 자율, 경쟁을 통한 성장 같은 개념이 거의 나오지 않는다. 백성은 굶지 않게 보호해야 할 대상이지, 스스로 부를 쌓아 삶의 조건을 바꾸는 존재로는 잘 그려지지 않는다.
백성 사랑하는 것과 권리 인정은 다른 문제
그래서 목민심서는 흔히 ‘민생을 위했다’고 평가되지만, 실제로는 민생을 크게 흔들지 않고 묶어 두는 정치 생각에 더 가깝다. 조선이 근대적인 경제 사회로 넘어가지 못한 이유가 바로 이 지점에서 잘 보인다.
그렇다면 이런 한계가 분명한 책이 왜 지금까지도 ‘좋은 책’으로 불려 왔을까. 이유는 책 자체보다, 이 책을 받아들여 온 한국 사회의 사고방식에 있다. 한국 사회는 오랫동안 문제의 원인을 제도보다 사람에게서 찾는 데 익숙했다.
그래서 늘 “착한 지도자” “청렴한 공직자” “도덕적인 정치인”을 기다려 왔다. 시스템을 고치는 데는 인색하면서, 사람을 바꾸는 데에는 큰 기대를 걸어왔다. 목민심서는 이런 기대에 아주 잘 들어맞는 책이다.
그래서 오늘날 정치인들이 목민심서를 읽는다고 말하는 장면은 더 불쾌하게 느껴진다. 그 말은 제도를 고치겠다는 다짐이 아니라, 나는 착한 사람이라는 자기 연출로 들리기 때문이다.
권력을 쥔 상태에서 “나는 늘 스스로를 경계한다”고 말하는 것만큼 쉬운 위선도 없다. 진짜 경계는 말이 아니라 행동과 구조에서 드러난다.
권한을 내려놓는지, 견제를 받아들이는지, 제도를 바꾸는지가 중요하다.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으면서 고전만 들먹이는 태도는, 고전을 존중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고전을 깎아내리는 일에 가깝다.
정약용 개인을 깎아내릴 필요는 없다. 그는 당대 기준으로 매우 성실했고, 진지했으며, 현실 문제를 깊이 고민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끝내 조선을 벗어나지 못했다.
조선의 국가관, 조선의 인간관, 조선의 도덕 정치라는 틀 안에서 생각했다. 그래서 그의 책은 혁명서가 아니라 조선을 그나마 덜 망가지게 운영하려는 관리 지침서로 남았다.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우리는 계속 같은 착각을 반복하게 된다. “옛사람들이 이미 답을 다 써놓았다” “우리는 그걸 따라 하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고전은 답안지가 아니다. 고전은 어디까지 갔고, 어디서 멈췄는지를 보여주는 기록이다.
목민심서는 백성을 사랑하라고 말하지만, 백성에게 권리를 주지 않는다. 청렴을 강조하지만, 권력을 나누지는 않는다. 도덕을 말하지만, 제도를 바꾸지는 않는다.
그래서 이 책은 오늘날 정치인의 침대 머리맡에 놓일 윤리 소품이 아니라, 전근대 정치의 한계를 살펴보기 위한 텍스트로 읽혀야 한다.
목민심서를 진지하게 읽는다는 것은 내용을 외우는 일이 아니라, 그 책이 끝내 넘지 못한 선을 분명히 보는 일이다. 그리고 그 선을 넘지 못한 정치가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는, 우리는 이미 역사 속에서 충분히 보아 왔다.
시인, 역사·철학 연구가, 번역가

◆ 松山
시인이자 역사·철학 연구자로 전 이승만학당 이사를 지냈으며 현재 한국근현대사연구회 연구 고문, 철학 포럼 리케이온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시집 네 권을 출간했으며 ‘후크고지의 영웅’을 공동 번역했다. 松山은 필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