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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현 작가칼럼] ‘떼법’이 일상이 된 사회… ‘정당한 격차’조차 못 견디는 사람들
  • 박주현 작가
  • 등록 2026-06-03 18:2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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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 “남에게 폐 끼치 마라”, 한국 “나를 불편하게 하지 마라”

최근 SNS에 “대통령님이 서민들이 박탈감을 느끼게 만드는 매직패스 같은 시스템을 막아주셨으면 합니다”라는 글이 올라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투표소로 향하는 길, 종이 한 장에 도장을 찍으며 문득 멈춰 서서 스스로에게 묻는다. 거창한 이념이나 진영의 승패를 떠나, 나는 과연 어떤 공기를 마시며 살아가는 나라를 원하고 있는가. 

 

정치가 제아무리 완벽한 제도를 약속한들, 결국 우리의 일상을 채우는 것은 길 위에서 마주치는 타인들과의 온도다.

 

요란했던 선거의 소음이 잦아드는 자리, 문득 내 머릿속에 가장 깊게 각인되 있었던 장면은 뜻밖에도 정치판 밖에 있었나보다. 바로 놀이공원의 ‘매직패스’ 논란이다.

 

나의 찰나적 불쾌감을 우주의 절대적 정의로 격상

 

정당한 대가를 더 지불하고 줄을 서지 않는 탑승권을 사는 행위. 그러나 이 평범한 룰이 대한민국 광장에 던져지자, 돌연 ‘계급을 나누는 차별’이자 ‘없어져야할 흉기’로 둔갑해버렸다. 

 

내가 두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면, 너 역시 돈이 얼마가 있든 나와 똑같이 다리 아픔과 지루함을 견뎌야 한다는 지독한 결벽증.

 

우리는 언제부터 이토록 타인의 ‘다름’과 ‘정당한 격차’를 인정하지 못하는 거대한 질투의 수용소가 되어버렸을까.

 

이 기괴한 현상의 기저에는 ‘불편’을 대하는 우리 사회의 뒤틀린 태도가 똬리를 틀고 있다. 우리는 흔히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다는 일본의 ‘메이와쿠(迷惑)’ 문화를 떠올리며 비교하곤 하지만, 지금 한국을 지배하는 감정의 잣대는 그 궤가 완벽히 반대다. 

 

일본의 그것이 내가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 조심하는 ‘자기 자신’을 향한 절제라면, 지금 대한민국 광장의 룰은 그 누구도 나를 조금이라도 불편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타인’을 향한 지독한 제재다. 

 

등수가 적힌 성적표가 사라지고, 운동장의 공놀이가 사라지고, 생명을 구하는 닥터헬기도 소음이라며 사라져야 하고, 갓난아기조차 공공장소에서 울어선 안 된다. 

 

나의 찰나적 불쾌감을 우주의 절대적 정의로 격상시키고, 그것을 빌미로 타인의 일상을 짓밟는 것을 당당한 권리라 착각하는 합법적 폭력인 셈이다.

 

이 얄팍하고 이기적인 통제욕은, 개그우먼 이수지의 풍자 영상이 뼈아프게 꼬집듯 이미 유치원과 학교를 넘어 사회 전체로 들불처럼 번져가고 있다. 

 

참는 법 가르치기보다 교사에게 전화부터

 

영상 속 과장된 학부모의 억지스러운 민원들은 코미디가 아니라 숨 막히는 다큐멘터리에 가깝다. 내 아이가 조금이라도 손해를 보거나 거슬리는 상황에 처하면, 아이에게 세상과 타협하고 참는 법을 가르치는 대신 곧바로 교사에게 전화를 걸어 시스템 자체를 뜯어고치려 든다.

 

이들은 아이들에게 사회라는 공론장에서 타인과 부대끼며 인내하는 법을 가르치지 않는다. 그저 목소리를 높여 생떼를 쓰고 진상을 부리면 세상의 룰마저 내 기분대로 바꿀 수 있다는 얄팍한 ‘갑질의 효능감’을 훈육할 뿐이다.

 

이 서늘한 원한의 감정과 ‘떼법’의 일상화는 하루아침에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오랜 시간 우리 사회를 지배해 온 진영의 얄팍한 선동 언어가 대중의 내면에 정교하게 주입해 온 독약의 결과물이다.

 

그들은 끊임없이 속삭여왔다. 다름은 곧 차별이고, 격차는 곧 누군가의 착취라고. 성공한 자, 앞서가는 자는 나의 몫을 빼앗은 적폐이니 그들을 끌어내리는 것이 정의라고 가르쳤다. 

 

합리적인 시스템과 룰을 존중하기보다는, 광장에 모여 목소리를 높이고 분노를 전시하는 자가 기어이 떼를 써서 법을 고치고 보상을 얻어내는 야만의 방식을 그들은 ‘민주주의’라는 거룩한 이름으로 포장해 주었다.

 

그렇게 어른이 되어버린 우리는 이제 타인에게 한 치의 곁도 내어주려 하지 않는다. 삶의 여유가 말라버린 척박한 토양 위에서, 사람들은 내면의 너그러움을 기르는 대신 세상의 모든 소음을 소거해 버리는 가장 폭력적이고 쉬운 길을 택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한다. 타인의 체취와 소음이 완벽하게 제거된 ‘진공(眞空) 상태’의 방에서는 그 어떤 생명도 숨을 쉴 수 없다. 

 

타인의 흔적 지우면 나도 사라져

 

내가 거슬린다는 이유로 타인의 흔적을 하나씩 지워나가다 보면, 결국 그 완벽한 무균실에 홀로 남겨진 나 자신조차 누군가에게는 제거되어야 할 또 다른 민폐로 전락하고 만다. 서로를 깎아내며 만든 차가운 적막 속에는 공존의 기쁨도, 사람 사는 냄새도 남지 않는다.

 

타인의 정당한 권리 행사 앞에서도 “내가 기분이 나쁘니 저 제도를 당장 없애라”고 윽박지르는 괴물들. 논리와 이성이 작동해야 할 시스템의 자리에, 가장 목소리 크고 가장 분노한 자의 생떼가 헌법 위에 군림하게 된 것이다.

 

차이를 인정하지 못하는 사회, 정당한 대가를 지불한 타인을 웃으며 보내줄 수 없는 사회는 결코 평등한 유토피아가 될 수 없다. 그것은 그저 누구도 앞서가지 못한 채, 서로의 발목을 잡고 원망의 눈초리만 번득이며 다 같이 지루한 줄을 서야 하는 완벽한 폐허일 뿐이다. 

 

목소리 큰 자들의 ‘떼법’이 상식을 대체해 버린 이 서늘한 광장에서, 우리는 관용이라는 민주주의의 근육을 모조리 상실한 채 앙상한 통제 사회로 걸어 들어가고 있다.

 

이번 선거를 돌이켜보면, 교육감 선거 정도를 제외하고는 누군가를 향해 공개적인 지지를 선언해 본 기억이 거의 없다. 오히려 ‘절대 권력을 쥐어서는 안 될 자’들의 민낯을 벗겨내고 경고하는 데 내 펜촉의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진해 버린 것은 아닌가, 조금은 후회가 밀려올 때도 있다.

 

마치 내가 직접 링 위에 오른 출마자라도 된 양 치열하게 핏대를 세웠던 그 시간들은, 사실 보수 진영의 특정 후보가 권력을 쥐기를 바라는 맹목적인 팬심이나 얄팍한 진영 논리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차라리, 타인의 사상과 취향을 현미경처럼 검열하고 일상을 촘촘하게 통제하려 드는 이 미쳐 돌아가는 세상의 폭주하는 모터를 어떻게든 멈춰 세워보려는 처절한 안간힘이었을 것이다.

 

내가 그토록 절박하게 지키고 싶었던 것은 특정 정치인의 권력이 아니다. 내 생각과 뼛속까지 다른 타인의 존재를 기꺼이 인정하고, 그 낯선 다름이 주는 껄끄러운 불편함마저 묵묵히 견뎌낼 줄 아는 진짜 ‘관용’의 근육. 모두가 똑같은 이념의 잣대로 재단되고, 조금만 거슬려도 서로를 혐오하며 멱살을 잡는 이 광기의 시대를 끝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목소리 큰 자들의 ‘떼법’과 통제욕이 사라진 빈자리에, 타인이라는 불편함을 묵묵히 견뎌낼 줄 아는 그 무겁고도 단단한 미덕이 이 척박한 나라에 다시 돌아오기를. 모니터 앞의 고독한 활자 노동을 핑계 삼아, 나는 아마도 그것을 그토록 간절히 기원했던 모양이다.

  




◆ 박주현 작가

 

작곡가, 음악감독, 칼럼니스트, 수필가. 페이스북에서 정치, 시사, 사회적인 이슈에 대해 활발하게 의견을 개진해 수많은 이의 공감을 얻고 있다. 에세이집 ‘폭풍의 바다를 건너다’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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