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 대표 유적인 ‘파르테논 신전’(왼쪽)과 고대 로마를 대표하는 ‘콜로세움’.
한국의 역사 교육과 대중 담론에서 그리스는 오랫동안 ‘민주주의의 요람’ ‘철학의 발상지’ ‘인간 중심의 휴머니즘’의 상징으로 소개되어 왔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페리클레스의 시대는 서양 문명의 출발점으로 강조되지만, 정작 로마 제국은 정복과 제국주의, 노예제의 이미지 속에 머무르는 경우가 적지 않다. 심지어 그리스 문화를 계승한 부차적인 문명 정도로 이해되기도 한다.
아테네의 민주정과 로마의 공화정
그러나 이러한 인식은 서양 문명의 형성과 발전 과정을 지나치게 단순화한 것이다. 서양 문명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리스의 이상주의와 함께 로마의 실용주의, 법치주의, 행정 능력, 국가 운영의 지혜를 함께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스만 배우고 로마를 외면하는 것은 서양사를 반쪽만 이해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고대 그리스는 인류 문명사에서 찬란한 성취를 남겼다. 아테네의 직접민주주의는 시민 정치의 원형을 제시했고, 철학과 논리학, 역사학과 연극은 이후 서양 문명의 토대를 이루었다. 시민이 토론을 통해 공동체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전통 역시 그리스에서 시작되었다. 이러한 유산은 오늘날 자유민주주의와 시민사회의 정신적 기반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에도 분명한 한계가 있었다. 아테네 민주주의는 모든 사람에게 열린 제도가 아니었다. 성인 남성 시민에게만 정치 참여가 허용되었고 여성, 노예, 외국인은 배제되었다. 또한 도시국가 중심의 정치체제는 국가 규모가 커질수록 한계를 드러냈으며, 내부 갈등과 정쟁은 결국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이어졌다.
이후 그리스 세계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을 거쳐 헬레니즘 시대로 넘어갔지만, 장기간 안정된 정치 질서를 구축하지는 못했다. 이상은 풍부했지만 대규모 국가를 지속적으로 운영하는 현실적 모델은 제시하지 못했다.
이러한 과제를 해결한 문명이 바로 로마였다. 로마는 철학보다 제도를, 이념보다 행정을, 이상보다 현실을 중시하였다. 공화정 시대에 발전한 원로원과 집정관 제도, 그리고 기원전 5세기 제정된 12표법은 서양 법치주의의 중요한 출발점이 되었다. 개인의 권리 보호, 계약의 원칙, 법의 안정성은 이후 유럽 법체계와 현대 민법의 기초가 되었다.
아우구스투스 시대 이후 로마는 약 200년에 걸친 팍스 로마나를 이루며 지중해 세계를 안정적으로 통합하였다. 방대한 도로망과 수도교, 항만과 행정조직, 군단 체계는 단순한 정복의 결과가 아니라 국가 운영 능력의 산물이었다. 로마는 수많은 민족과 문화를 하나의 질서 속에 편입시키며 제국을 유지하는 방법을 보여주었다.
미국의 모태는 로마 공화정
로마의 강점은 그리스 문화를 배척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히려 그리스 철학과 문학, 예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되 현실 정치와 행정에 맞게 재해석하였다. 그리스가 사유의 문명을 만들었다면 로마는 그것을 국가 운영의 기술로 발전시켰다. 철학은 행정으로, 수사학은 정치로, 법학은 국가 질서로 이어졌다. 이러한 융합이야말로 오늘날 서양 문명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도 이러한 균형은 필요하다. 민주주의와 자유, 인권과 평등이라는 가치만큼이나 법치, 공공성, 행정 능력, 국가의 지속 가능성 역시 중요하다. 이상을 이야기하는 것만으로 국가는 운영되지 않는다. 제도와 규칙, 책임과 조직이 함께 작동할 때 공동체는 안정적으로 발전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로마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살아 있는 교과서이다.
미국의 건국 지도자들이 로마 공화정을 중요한 참고 모델로 삼았다. 상원 제도와 공화주의, 법치주의는 로마의 경험 속에서 발전하였고 현대 민주국가의 제도 설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서양 문명의 역사는 그리스에서 시작되었지만, 로마를 통해 제도화되고 세계로 확산되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이제 우리 역사 교육도 균형을 되찾아야 한다. 그리스 신화와 철학만이 아니라 로마의 법과 행정, 군사와 국가 운영의 역사까지 함께 배울 때 비로소 서양 문명의 전체 모습을 이해할 수 있다. 그리스는 인간에게 이상을 제시했고, 로마는 그 이상을 현실 속에서 구현하는 방법을 보여 주었다. 이상과 현실, 철학과 제도는 서로 경쟁하는 가치가 아니라 함께 발전해야 할 문명의 두 축이다.
그리스만 아는 것은 반쪽의 서양사를 아는 것이다. 로마를 함께 배울 때 우리는 서양 문명의 진정한 깊이와 오늘의 국가 운영이 얻을 수 있는 역사적 교훈을 더욱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 松山 정광제
시인이자 역사·철학 연구자. 전 이승만학당 이사. 현 한국근현대사연구회 연구고문이자 철학 포럼 리케이온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시집 네 권을 출간했고, ‘후크고지의 영웅들’을 공동 번역했으며 인문서 ‘신화가 된 조선’ ‘다다미 위의 인문학’ ‘자유주의자의 그람시 읽기’를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