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바리 부인의 죽음’(1889) 알베르-오귀스트 푸리 작. 귀스타브 플로베르가 1857년에 발표한 ‘보바리 부인’에서 영감을 얻었다.
책은 독자를 설득하기 전에 먼저 움직인다. 뛰어난 문장은 머리보다 감정을 먼저 흔든다. 어떤 장면은 분노를 일으키고, 어떤 대목은 눈물을 흘리게 하며, 어떤 표현은 오래 묻어 두었던 열등감이나 자존심을 건드린다. 그래서 독서는 단순히 지식을 얻는 행위가 아니다. 인간의 감정 전체가 참여하는 경험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독서는 특별하다. 사람들은 흔히 책을 읽고 생각한 뒤 결론을 내린다고 믿는다. 그러나 실제 과정은 그와 다를 때가 많다. 먼저 감정이 반응하고, 그다음에 그 감정을 뒷받침하는 이유를 찾는다. 우리는 이성적으로 판단했다고 생각하지만, 이미 마음이 먼저 움직인 뒤인 경우가 적지 않다.
감동이 결론이 되어선 안 된다
그래서 침투를 끊는 독서법이 필요하다. 이것은 책을 믿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좋은 작품을 냉정하게 해부하라는 주장도 아니다. 오히려 작품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한 방법이다. 감정에 완전히 휩쓸리지 않을 때 독자는 작품의 구조와 의도를 더욱 넓게 바라볼 수 있다.
감동은 독서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감동이 곧 결론이 되어서는 안 된다. 눈물이 났다면 왜 눈물이 나는지 살펴보고, 분노가 치밀었다면 누구를 향한 분노인지 확인해야 한다. 연민이 생겼다면 그것이 인물의 삶 때문인지, 작가의 서술 방식 때문인지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감정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관찰하는 것이다.
가장 먼저 필요한 훈련은 반응을 조금 늦추는 일이다. 책을 읽다가 마음이 크게 흔들리는 문장을 만나더라도 곧바로 동의하거나 반박하지 않는다. 잠시 멈추어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 보는 것이다.
“나는 왜 이 문장에서 불편함을 느꼈는가” “왜 이 인물에게 마음이 끌리는가” “이 장면이 내 삶의 어떤 경험과 연결되고 있는가” 이러한 질문을 시작하는 순간 작품은 더 이상 독자를 끌고 가는 힘만 가진 것이 아니라 함께 살펴볼 대상이 된다.
이때 감정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감정이 독자를 지배하지 못하게 된다. 눈물도 그대로 있고, 분노도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러나 그것을 한 걸음 떨어져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독자는 작품 안에서 흔들리면서도 동시에 자신을 관찰하는 위치를 유지하게 된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을 읽을 때도 이러한 태도가 필요하다. 라스콜니코프는 가난하고 불안하며, 외로움 속에서 살아가는 청년이다. 독자는 그의 절망과 고통을 따라가면서 자연스럽게 연민을 느끼게 된다. 작품이 그의 내면을 매우 섬세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기에서 멈추면 작품을 절반만 읽게 된다. 그는 고통받는 청년인 동시에 타인의 생명을 빼앗은 살인자이기도 하다. 그의 불안은 이해할 수 있지만, 그의 선택까지 정당화할 수는 없다. 인물에 대한 연민과 행위에 대한 평가는 서로 다른 문제이다. 둘을 구분하지 못하면 독자는 어느새 인물의 감정 속으로 완전히 들어가 버린다.
이 분리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문학은 강한 착시를 만들어 낸다. 매력적인 인물은 옳아 보이고, 불행한 인물은 쉽게 용서를 받으며, 아름다운 문장으로 표현된 생각은 진실처럼 느껴진다. 문학의 힘이 강할수록 이러한 착시도 더욱 커진다.
그래서 독자는 작품 속 인물을 사랑할 수는 있어도 그 인물의 판단까지 그대로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그의 마음은 이해하되 그의 선택엔 냉철하라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도 좋은 예이다. 엠마 보바리는 반복되는 일상과 지루한 현실에서 벗어나 낭만적인 사랑을 꿈꾼다. 독자는 그녀의 답답함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현실에 대한 갈증과 더 나은 삶을 향한 욕망 역시 공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과 그녀의 선택을 옹호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플로베르는 엠마를 비난하지도, 영웅으로 만들지도 않는다. 다만 한 인간이 환상에 사로잡혀 현실을 무너뜨려 가는 과정을 차분하게 보여준다. 독자의 역할은 감정에 빠지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을 함께 성찰하는 데 있다.
‘마담 보바리’를 읽을 때 독자는 세 가지를 나누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째는 인물의 감정이다. 둘째는 사건이 흘러가는 방향이다. 셋째는 독자 자신의 판단이다. 이 셋이 뒤섞이면 작품이 만들어 낸 분위기에 쉽게 휩쓸리지만, 서로 구분하기 시작하면 독서는 훨씬 깊어진다.
인물은 자신의 감정에 따라 움직인다. 작품은 그 감정이 어떤 결과를 만들어 내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그 선택을 어떻게 평가할지는 끝까지 독자의 몫이다. 그래서 좋은 독서는 인물과 함께 울면서도, 동시에 그 눈물을 한 걸음 떨어져 바라볼 줄 아는 독서이다.
독자는 스스로에게 계속 질문해야 한다. “이 인물은 왜 이렇게 행동하는가” “작가는 이 감정을 어디까지 밀고 가고 있는가” “나는 이 선택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이 세 가지 질문만 놓치지 않아도 작품 속 감정에 완전히 끌려가는 일은 훨씬 줄어든다.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도 같은 방식으로 읽을 필요가 있다. 주인공 뫼르소는 사회가 요구하는 방식대로 슬퍼하지 않는다. 어머니의 장례식에서도 눈물을 보이지 않고, 남들이 기대하는 감정을 연기하지도 않는다. 이러한 모습 때문에 많은 독자는 그를 위선 없는 인간으로 받아들이기 쉽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조심해야 한다. 사회적 위선을 비판하는 것과 인간의 무감각을 긍정하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니다. 뫼르소가 사회의 가면을 벗겨 보인다고 해서 그의 모든 태도가 곧 진실이 되는 것은 아니다. 독자는 작품이 던지는 충격을 자신의 신념으로 너무 빨리 바꾸지 말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카뮈를 읽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을 카뮈라는 이름으로 확인하는 데 그칠 수도 있다.
문학을 깊이 읽으려면 질문을 회복해야 한다. 많은 사람은 “이 작품의 주제는 무엇인가”부터 묻는다. 물론 중요한 질문이다. 그러나 너무 빨리 결론으로 향하는 질문이기도 하다. 더 먼저 던져야 할 질문이 있다.
“이 작품은 나를 어느 방향으로 끌고 가려 하는가?”
“작가는 어떤 인물을 가장 설득력 있게 그리고 있는가?”
“나는 왜 저 사람보다 이 사람에게 더 마음이 움직이는가?”
“작품 속에서 끝내 목소리를 얻지 못한 사람은 누구인가?”
이러한 질문은 독자를 작품 안에 머물게 하면서도 작품에 흡수되지 않도록 만든다.
질문을 놓치지 마라
문학 작품은 언제나 선택을 한다. 어떤 인물은 가까이에서 오래 보여주고, 어떤 인물은 멀리서 짧게 지나간다. 어떤 고통은 세밀하게 묘사하지만, 또 다른 피해는 한두 문장으로 끝내기도 한다.
어떤 생각은 아름다운 문장으로 빛나게 만들고, 다른 생각은 배경 속으로 조용히 밀어 넣는다. 이것은 작품의 결함이 아니라 문학이라는 장르의 본질이다.
따라서 독자는 작가가 비춘 곳만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빛이 닿지 않은 자리도 함께 상상해야 한다. 누가 중심에 서 있고, 누가 주변으로 밀려났는지, 어떤 목소리는 크게 들리고 어떤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는지까지 함께 살펴보아야 한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는 이러한 독서법이 왜 필요한지를 잘 보여준다. 맥베스는 왕이 되겠다는 야망에 사로잡혀 왕을 살해하고, 이후 죄책감과 공포 속에서 점차 무너져 간다. 작품은 그의 내면을 놀라울 만큼 깊이 묘사한다. 독자는 어느새 희생자보다 맥베스의 불안과 고통에 더 오래 머물게 된다.
바로 이때 질문해야 한다. “나는 왜 가해자의 고통을 더 오래 바라보고 있는가” “희생자의 침묵은 작품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가” “비극의 아름다움에 마음을 빼앗기면서 책임의 문제를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 질문이 없으면 독자는 작품이 만든 감정의 흐름 속으로 자연스럽게 빨려 들어간다.
그러나 질문이 살아 있는 독자는 같은 작품을 읽더라도 훨씬 넓은 시야를 갖게 된다. 문학을 감상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문학이 어떻게 독자의 감정을 움직이는지까지 함께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침투를 끊는 독서법은 작품을 의심하는 기술이 아니다. 독자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는 기술이다. 지금 나는 누구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는가. 누구의 고통에는 쉽게 반응하고, 누구의 고통에는 무심한가. 누구의 말은 별다른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누구의 말은 처음부터 경계하고 있는가.
이러한 질문은 독서를 느리게 만들지만, 결코 얕게 만들지는 않는다. 오히려 작품이 가진 구조와 설득의 방식을 더 선명하게 보게 만든다.
인용을 경계하라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인용을 경계하는 습관이다. 사람은 긴 작품보다 짧은 문장에 훨씬 쉽게 사로잡힌다. 인상적인 한 줄은 기억하기 쉽고, 다른 사람에게 전하기도 쉽다. 그래서 독자는 마음에 드는 문장을 자신의 생각처럼 사용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문장은 혼자 존재하지 않는다. 언제나 작품 전체 속에서 의미를 얻는다.
앞뒤 맥락을 떼어 낸 문장은 전혀 다른 뜻으로 읽힐 수도 있다. 그래서 마음에 남는 문장을 만났을 때는 먼저 몇 가지를 확인해야 한다. “이 말을 한 사람은 누구인가” “작가는 이 인물을 신뢰하도록 그리고 있는가” “이 말 뒤에는 어떤 결과가 이어지는가” 이러한 질문을 거치면 한 문장을 작품 전체와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다.
특히 악인의 말은 더욱 조심해서 읽어야 한다. 문학은 악을 단순하고 어리석게 그리지 않는다. 오히려 악은 지적이고, 우아하며, 논리적이고, 때로는 깊은 상처를 지닌 사람의 모습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그래서 독자는 쉽게 매혹된다. 아름다운 문장과 뛰어난 논리는 언제나 선한 목적만을 위해 사용되는 것이 아니다.
나쁜 생각은 거친 언어만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세련된 문장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고독한 인간의 독백 속에 숨어 있기도 하며, 시대를 비판하는 목소리를 빌려 독자의 마음을 움직이기도 한다.
약자의 분노와 정의로운 외침처럼 들리면서도 전혀 다른 방향으로 독자를 이끌 수도 있다. 문학을 깊이 읽는다는 것은 이러한 매력을 충분히 느끼면서도, 그 말이 결국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끝까지 확인하는 일이다.
독서 노트를 작성하라
독서 노트를 쓰는 습관도 큰 도움이 된다. 다만 줄거리나 등장인물을 정리하는 노트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의 반응을 기록하는 일이다. “이 장면에서 화가 났다” “여기서는 주인공 편을 들고 싶어졌다” “이 문장을 읽으며 작가가 나를 설득하고 있다고 느꼈다” 이런 기록은 작품을 요약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인 자신을 관찰하는 작업이다.
시간이 지나 다시 그 노트를 읽어 보면 하나의 작품보다 자기 자신의 독서 습관이 먼저 보이기 시작한다. 어떤 인물에게 쉽게 마음이 움직이는지, 어떤 상황에서 분노하는지, 어떤 종류의 문장에 약한지를 발견하게 된다. 작품을 공부하는 동시에 자기 자신을 공부하게 되는 것이다.
다양한 작품을 읽어라
또 하나 중요한 방법은 한 작품을 읽은 뒤 의도적으로 다른 시각의 작품을 함께 읽는 습관이다. 혁명을 찬양하는 소설을 읽었다면 혁명 이후의 폭력을 다룬 작품도 읽어야 한다.
개인의 자유를 노래하는 작품을 읽었다면 자유가 타인에게 어떤 상처를 남길 수 있는지를 다룬 작품도 함께 읽어야 한다. 민족의 고통을 다룬 작품을 읽었다면 그 민족 내부의 폭력과 모순을 보여 주는 작품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쪽만 읽으면 감동은 커질 수 있지만 판단은 점점 좁아진다.
문학은 분명 인간을 변화시킨다. 그것이 문학의 가장 위대한 힘이다. 그러나 모든 변화가 반드시 성숙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어떤 독서는 사람의 시야를 넓혀 주지만, 어떤 독서는 오히려 기존의 신념만 더욱 단단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 차이를 만드는 것은 작품이 아니라 독자의 질문이다.
질문을 잃은 독자는 작품에 흡수된다. 감동과 분노를 자신의 생각으로 착각하고, 작가가 만든 시선을 그대로 자신의 세계관으로 받아들인다. 반대로 질문을 놓지 않는 독자는 작품과 끝까지 대화한다. 감동도 느끼고, 눈물도 흘리며, 마음도 흔들리지만 마지막에는 자신의 판단으로 돌아온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하나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는 일이다. 그러나 그 세계에 영원히 머물 필요는 없다. 충분히 경험하고, 마음껏 흔들리고, 인물과 함께 기뻐하고 슬퍼한 뒤에는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야 한다. 그때 독자는 작품의 포로가 아니라 작품의 증인이 된다.
문학을 사랑한다는 것은 무조건 믿는 일이 아니다. 끝까지 읽고, 깊이 공감하고, 다시 질문하는 일이다. 감동을 느끼되 감정에 지배되지 않고, 설득을 경험하되 스스로 판단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그 질문이 살아 있는 한 독서는 침투가 아니라 자유가 된다. 그리고 바로 그 자유가 문학이 인간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다.

◆ 松山(송산) 정광제
시인이자 역사·철학 연구자. 전 이승만학당 이사. 현 한국근현대사연구회 연구고문이자 철학 포럼 리케이온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시집 네 권을 출간했고, ‘후크고지의 영웅들’을 공동 번역했으며 인문서 ‘신화가 된 조선’ ‘다다미 위의 인문학’ ‘자유주의자의 그람시 읽기’를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