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칼럼니스트
문재인은 재임 시절, 10월 1일 국군의 날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다. 정통성이 없다고 평가하면서, 광복군 창설일(9월 17일)로 국군의 날을 변경하는 방안을 검토한 바 있었다.
우리가 10월1일을 국군의 날로 정한 이유는 1950년 9월 28일 서울 수복 후, 국군이 38선을 돌파한 날이기 때문이다. 38선 돌파는 곧바로 북진통일이란 의미를 지닌다. 그리하여 바로 통일을 위해, 우리는 10월 1일을 '국군의 날'로 정한 것이다.
그러나 간첩 문재인은 '38선 돌파'라는 의미를 지닌 국군의 날이 눈엣가시였을 것이다. 육사에서 6.25 관련 교과목도 없애버린 문재인이 국군의 날을 가만 놔둘 리 없었다.
그리하여 6·25 남침 공로로 김일성에게 훈장을 받은 김원봉을 국군의 뿌리인 것처럼 말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0월 1일 국군의 날을 9월17일로 옮기고 싶어했다. 그러나 이 문제가 강력한 반발에 부딪혀 좌절되자, 이윽고 홍범도 장군을 끌어들인 것이다. 머나면 카자흐스탄에서 고요히 영면 중이던 장군이었다.
그때부터 죄없는 홍범도 장군의 비극은 시작되었다. 독립군으로서 위대한 위업이 사라지고, 우익을 가장한 뉴라이트 친일파들에게 볼세비키 공산당원으로 지목되어 무수한 비난을 받게 된 것이다.
따라서 홍범도를 이용하고자 한 문재인이나 홍범도 장군을 공산주의자로만 몰아세운 뉴라이트 계열의 친일파 모두 한치 어김없는 반역자들이라 판단해야 한다.
홍범도 장군의 공산당 입당은 당시 정세를 살펴보아야 이해할 수 있다. 봉오동 전투 당시, 그때 독립군은 소련의 지원으로 모든 무기와 전투에 필요한 보급을 받고 있었다. 따라서 장군께서는 소련을 조선독립을 위한 원군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지식인들도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모를 때였다. 하물며 산골포수였던 홍범도 장군이 공산주의를 알았을 까닭이 없다.
당시 러시아는 내전 중이었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 후 몇 해 동안 시베리아에서는 볼셰비키(적군)와 멘셰비키(백군)가 대립하고 있었으며, 여기에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의 반란과 외국의 무력간섭이 겹쳐 일대 혼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1918년 4월에는 일본이 시베리아에 출병하여 러시아 백군을 지원하면서 반일 독립무장투쟁을 하는 한인무장대를 소탕하고자 했다. 이에 대한독립군은 러시아 내전에서 적군파에 가담했고, 일본군은 1920년 4월 4~5일 야간에 블라디보스토크의 모든 볼셰비키 기관 및 신한촌을 비롯한 한인 밀집지대를 습격하기도 했다. 일본이 백군을 지원하자 그 반대방향으로 적군을 지원하게 된 것이다.
그러자 왕당파 백군을 몰아내고 볼셰비키 혁명을 완성하기 위한 레닌은 일본의 힘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에 독립군을 토벌하고자 하는 일본의 목적이 서로 맞아 떨어졌다고 보아야 한다.
이 무렵 일제는 봉오동(1920년 4월)과 청산리(1920년 10월) 전투 패배에 이를 갈고 있었다. 러일전쟁까지 무패의 일본군이었다. 그런 일본군이 정규군도 아닌 일개 의병의 무리들에게 거의 전멸하다시피 패전한 그 치욕을 반드시 갚아야 했다.
모든 것이 봉오동과 청산리 패배 복수를 위한 일제의 음모였다. 가소롭게도 뉴라이트는 이 대목을 빼고 역사를 조작하고 있었다. 일본군은 청산리 인근 동포들을 아주 가혹하게 집단살해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일본이 가장 증오했던 인물이 홍범도와 김좌진이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일본은 봉오동과 청산리 패전 이후 독립군(약 3000명)을 소탕하기 위해 25,000명이라는 대부대를 동원하는 동시에 소련의 레닌과 협상을 맺는다.
그리고 1921년 6월 자유시 참변을 일으킨다. 당시 자유시로 독립군을 모이게 한 것은 레닌이었다. 단일단체를 만들어 독립군 지원을 원활하게 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으나, 그런 이유로 인해 독립군의 무장해제를 요구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일본의 음모를 짐작할수 있는 것이다. 일본은 레닌에게 볼세비키 혁명 완수를 위한 지원을 약속했음이 분명하였다.
마침내 레닌은 독립군의 무장해제를 요구하였고 이에 반발하는 독립군들은 조선인 출신 소련군 오하묵을 시켜 사살케 한다. 무려 1000여명에 달하는 독립군들이 죽거나 다쳤다. 이것이 자유시 참변이다.
여기에 일본의 첩자들이 개입하여 총질하였다는 것은 정설이다.. 수많은 전투를 겪으며 단련된 독립군을 소련군 따위가 그토록 쉽게 몰살에 가깝도록 죽였을 리 없다. 이후 오하묵은 소련군 대좌에 오른다. 따라서 이 모든 것은 독립군 일망타진을 계획했던 일본과 레닌이 짠 음모였다.
그리하여 일본의 복수 1차계획은 완성되었다. 부대 단위의 독립군은 와해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남은 독립군 잔존세력들에 대한 2차 토벌계혹이 진행되는 것이다.
홍범도는 자유시 참변 3일 후 현장에 들어갈 수 있었고, 김좌진 장군은 참변을 피해 도망칠 수 있었다. 철기 이범석도 가까스로 몸을 피하여 도망하였다. 바로 이분들에 대한 처단을 일제는 진행시켰다.
그리하여 1930년 1월 김좌진 장군이 두 명의 공산당 청년당원들에게 살해되었고, 수많은 독립군들이 일본에 포섭된 만주 마적들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이 무렵 만주에서 독립군들은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이것이 일본의 2차 복수였다.
그리고 1932년 만주일대를 점렁한 일제는 만주국을 세운다. 이 무렵 만주를 장악한 일제에 의해 마적을 이용한 독립군 살해가 빈번해지고, 이윽고 독립군 활동은 멈추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1937년에 복수 3차계획이 이루어진다. 그것은 독립군 지원세력이 될 수 있는 조선인들을 모조리 연해주에서 추방시키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홍범도 장군과 동포들은 스탈린에 의해 강제이주되어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등으로 뿔뿔이 흩어버린다. 아예 뭉칠 수 없도록 만들어 버린 것이다.
이것이 봉오동 청산리 패배 복수를 위한 일본의 3차계획이었다. 이후 스탈린은 1941년 4월 일본과 중립조약 즉 불가침조약을 맺는다.
홍범도 장군이 그나마 목숨이라도 부지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공산당에 가입한 까닭으로 목숨만은 살려뒀는지 모른다. 그리고 1943년 장군께서는 그토록 그리던 조국산천에 돌아오지 못하고 타계하셨다.
그러므로 자유시 참변은 독립군 섬멸을 계획한 일본과 적백내전에 승리하기 위해 일본의 도움을 필요로 한 레닌이 합작한 사건이었다. 고로 자유시 사건으로 홍범도 장군이 비난 받을 이유는 없다. 그리고 문재인의 필요에 인해 2021년 장군께선 그토록 그리워하던 고국에 돌아오셨던 것이다.
참고로, 문재인이 국군의 뿌리로 삼고자 하였던 김원봉은 뿌리 갚은 공산주의자였으며, 일설로는 일본에 체포되어 고문 끝에 일제 밀정이 되었다는 인물이다. 후일 장준하는 광복군으로 활동할 때 만나본 김원봉에 대해서 매우 비판적이었다. 그는 김원봉이 백범 김구선생이 이끌던 임시정부 일에 사사건건 반대하더라는 자서전 기록을 남긴 바 있다.
해방 후 일제 친일경찰 노덕술에 의해 뺨을 맞았다는 사실도 이를 증명한다. 고등계 경찰로 최고의 정보를 접하는 위치에 있던 노덕술이 김원봉이 일제 밀정임을 몰랐을 까닭이 없다.
그리하여 문재인은 문제 많은 김원봉을 버리고 홍범도 장군을 이용하기로 한다. 홍범도 장군이 레닌의 권유로 당시 공산당에 입당하였기 때문이다. 공산당에 입당한 홍범도장군은 문재인이 이용하기에 매우 적절했을 것이다.
이에, 문재인의 속셈을 파악한 우익인사들에 의해, 홍범도 장군은 볼세비키 공산주의자로 매도당하기 시작하였다. 신원식 장관도 홍범도 장군을 볼세비키 공산주의자라 분명하게 지적하였었다.
고요히 카자흐스탄 묘지에 잠들어 있던 홍범도 장군이었다. 그러나 장군은 비열한 공산좌빨들에게 이용당하는 불운을 맞이하였다. 심지어 레닌이 준 권총을 찼다고 민족배신자가 되었다. 독립군에게 무기와 물자를 공급해준 소련의 지도자가 준 선물을 놓고, 너무나 지나친 과장이 시작된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중앙아시아로의 강제이주에 대한 이유가 가소롭다. 스탈린은 그 이유를 조선인과 일본인이 비슷하게 생겨서 구별이 안된다는 말로 핑계를 댔지만, 당시 만주 지역엔 조선인을 닮은 만주인들이 얼마든지 있었다. 바이칼 호수 인근에도 우리와 닮은 부족들이 있었다.
다시 말하지만, 강제이주 또한 일본이 제안한 일이었음이 분명해진다. 만약 조선인들이 연해주에 남아있게 된다면, 조선인들의 지원을 받아 다시 독립운동이 벌어질 것은 분명한 일이었다.
그러나 어리석은 백성들은 일본의 하와이 진주만 공격이 성공하고 남양군도 일대를 장악할 때, 승전분위기에 휩쓸려 너나없이 징병과 징용에 앞다퉈 나갔다. 춘원 이광수도 대일본제국을 위해 정신대며 징병에 나갈 것을 독려하였다. 사회지도층에 있던 대부분의 인사들이 일본에 적극 협조하였다.
지금 그 후손들이 조선인의 국적이 일본이었다는 말을 하는 것으로 안다. 그리고 광복 50년이 지날 무렵 김대중 정권 때부터 일제의 망령이 뉴라이트라는 이름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한때 보수논객이었던 조갑제도 친일의 대열에 서있는 중이다.
그리고 윤석열 정권시대에 35개에 이르는 역사단체를 장악하였다. 그들은 교과서 내용도 고치면서 역사전쟁을 시작하였다. '한반도 침략'이 아니라 '한반도 진출'이라는 표현으로 일제침략을 옹호하였다.
8월 29일은 나라를 빼앗긴 국치(國恥의 날이다. 설령 나라를 빼앗긴 조선인들의 국적이 일본이었다 할지라도, 일본국적이 자랑스러울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부끄럼없이 말하는 자를 볼 때마다, 그가 저주받을 친일파라는 생각이 굳어진다. 천벌을 받을 일이라 굳게 믿는다.
지금 우리는 앞뒤로 적을 맞이하고 있는 형국이다. 정면에는 북한과 중국의 조종을 받는 빨갱이들이 정권을 잡아 나라를 뒤흔들고 있고, 배후에는 뉴라이트 친일파세력들이 우리들의 복장을 긁으며 역사를 뒤집고 있다.
홍범도 장군은 청산리 전투를 마치고, 그해 10월 독립군 무리를 이끌고 떠나면서, 사랑하는 두 아들과 아내를 묻은 땅, 압록강 저 너머 남쪽 산맥들을 바라보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내가 오늘 떠나면 언제 다시 돌아와, 저기 저 산천을 바라볼 수 있을꺼나."
그러나 장군께선 살아서는 다시 돌아오지 못하였다. 2021년 카자흐스탄에서 그분의 시신이 돌아오는 날, 우리 대한민국 공군기들이 그분을 맞이하였다.
"사람들아, 잊어서는 안된다. 빨갱이도 뉴라이트놈들도 믿지마라. 둘다 우리의 적이다. 다만 홍범도 장군은 세계 최초로 불패의 일본군을 물리친 우리 민족의 영웅이었음을 잊지 말자."
맺음말
빨갱이와 쪽바리 사이. 누군가는 빨갱이들과 싸우기 위해 친일파라는 존재를 인정하고 도움을 허용하자는 말을 하나, 이 또한 어리석은 일입니다. 쪽바리들도 빨갱이만큼 위험합니다.
청산리 전투 후 인근 동포들에게 일제가 무슨 짓을 어떻게 했나, 그 예를 한번 들어볼까요.
저고리는 벗기지 않은 채 치마만 벗긴 중년여인을 일본군들이 에워싸고 겁간을 하는 장면. 배를 가르자 창자가 쏟아져 나온 여인은 이를 악물고 눈을 감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남자들은 모조리 목을 베어 쌓아놓고, 머리 하나를 들고 웃고 있는 일본군 사진들. 궁금하시면 얼마든지 있으니, 한번 검색해 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빨갱이든 쪽바리든 상관치 않습니다. 둘 다 우리의 적이므로 맞서 싸우면 그만입니다. 적이 하나든 둘이든 문제될 것은 없습니다. 빨갱이와 싸우기 위해 또다른 적을 끌어들이는 짓은 하지 않겠습니다. 동학을 진압하기 위해 일본군을 끌어들인 결과는 망국이었습니다.
8월 29일은 국치일입니다. 모쪼록 나라와 민족을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보시기 바랍니다.
※ 외부 필진의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이 기사에 6개의 댓글이 달려 있습니다.
10. 홍범도는 소련군에서 계급이 대위인데 대위가 어떻게 장군이죠?
9. 일제시대 때 조선인 국적이 일본이죠? 조선인 국적인 한국이었나요 일제시대 때. 조선인들이 해외로 만약 나갈 때 여권 국적은 어땠는데요 손기정이 왜 일본대표로 나왔죠? 이승만 대통령이 불편하게 무국적자 생활을 한 건 왜 그랬을까요?
https://www.youtube.com/live/e-_Dtasa3xs?si=GsBNjl4UKkdS3KWs&t=1605 이것 좀 보고 공부 좀 하세요
8. 청산리 봉오동 전과 부풀리기 신화를 믿는 건. 김일성이 솔방울로 수류탄을 만들어서 일본군을 이겼다는 걸 믿는 거랑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청산리 봉오동에 열받아서 일본군이 대대적 토벌을 했다고요? 4. 애초에 봉오동은 독립군을 일본군이 대군으로 토벌하려고 포위섬멸하다가 여기서 빠져 나오려고 하다가 터진건데요. 5 그리고 일본군이 동포들에게 한 만행이라고 하시는데 6. 왜 김좌진이 동포들에게 한 것. 그래서 민심을 잃은 것은 아시나요? 그 이야기는 왜 안 하시나요? 7. 항일만 하면 뭘해도 괜찮다는 식의 기존 민족주의 사관에서 벗어나지를 못하시는 건지. 기본적인 역사적 팩트에서도 좀 문제가 있는 말씀을 하시네요. 8. 청산리 봉오동의 날조신화를 그대로 인용하는 것 그렇고.
이번 글은 좀 역사랑 다른 게 많네요. 1. 뉴라이트가 좌파쪽에서 온 사람들이지만 그래도 기존 민족주의 민중사학보다는 훨씬 실증적이구요. 이 사람들 친일파라고 매도하는 거에는 반대 그걸 떠나서. 2. 청산리나 봉오동은 전과를 300배이상 부풀렸어요. 이걸 대승이라고 한 건 날조신화입니다. 봉오동만 해도 일본군 기록은 전사가 1명으로 나옵니다. 3. 그리고 청산리 봉오동을 일본에서 패배로 보지도 않았지만 서도. 그거에 열받아서 토벌을 했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