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보팅·승복 서약, 절차적 정당성의 실종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자는 우화는 모두가 위험을 알면서도 정작 그 일을 실행할 이는 아무도 없다는 인간사의 비극을 전한다.
지금 국민의힘 전당대회가 직면한 현실이 꼭 그렇다. 케이보팅과 ARS라는 불투명한 시스템, 그리고 후보자들에게 강제된 ‘승복 서약’은 민주주의의 최소 원칙인 절차적 정당성을 위협하고 있다.
그러나 후보자들은 각서로 권리 포기를 강요받았고, 당 지도부는 침묵하며, 중앙선관위는 책임을 피해간다. 모두가 문제를 알면서도, 아무도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지 않는다.
문제는 ‘부정선거’가 아니다.
이번 논란의 본질은 절차적 정당성이다.
선거란 결과에 승복하는 정치적 의례보다, 검증이 가능한 과정이 우선되어야 한다. 그러나 국민의힘이 출마자들에게 제출을 요구한 ‘공정경쟁 및 선거결과 승복 서약서’에는 단순한 결과 수용을 넘어서는 조항이 포함돼 있다. 케이보팅·ARS 등 당 선관위가 정한 투표방식과 절차, 그리고 경선 결과에 대해 소송을 포함한 일체의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곧 절차 전체에 대한 문제 제기를 봉쇄하는 장치다.
한 헌법학자는 “정당이 후보자에게 재판청구권을 포기하라는 서약을 요구하는 것은 헌법 제27조에 정면으로 반하는 조항”이라며 “결과 승복과 절차 검증 봉쇄는 다른 차원의 문제인데, 이를 혼동해 강제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를 무너뜨리는 행위”라고 지적했다.
승복 서약은 정치적 안정과 당내 화합을 위한 장치로 오래 전부터 관행처럼 존재했다. 실제로 미국 공화당도 대선 경선 과정에서 이른바 ‘로열티 서약(loyalty pledge)’을 요구한다. 이는 “경선에서 패배하더라도 당 후보를 지지하고, 제3당이나 무소속 출마를 하지 않는다”는 정치적 약속이다.
그러나 이 서약은 어디까지나 상징적 성격일 뿐, 법적 구속력은 없고 실제로 파기되더라도 아무런 제재가 없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역시 2016년 경선 과정에서 이를 어기고 독자 행보를 시사했지만, 법적 책임은 전혀 지지 않았다.
문제는 국민의힘의 승복 서약은 이와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점이다. 미국식 서약이 정치적 충성심을 강조하는 정치적 관행에 불과하다면, 한국식 서약은 헌법상 권리인 재판청구권 자체를 제한하는 불법적 강제에 가깝다. 단순한 정치적 승복과 절차적 검증 봉쇄를 동일선상에 놓는 것은 명백한 오류다.
더구나 이 구조는 후보자들에게만 불리하다. 경선에 뛰어든 후보자가 “절차가 불투명하다”는 문제 제기를 하면, 그는 곧장 “불복 프레임”에 갇히게 된다. 서약서를 근거로 지도부는 “스스로 동의했으면서 왜 문제를 삼느냐”라고 반박할 수 있다. 결국 후보자들은 불합리함을 알면서도 침묵할 수밖에 없는 구조에 갇힌다. 당내 민주주의는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봉쇄되고, 책임 있는 주체는 사라진다.
논란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로까지 확장된다.
만약 중앙선관위가 케이보팅·ARS 시스템을 제공하는 조건으로 “이의제기 금지 서약”을 요구했다면, 이는 명백한 권한 남용이다. 선관위는 헌법기관으로서 중립적 선거 관리 임무만을 맡고 있을 뿐, 정당 내부 절차에 개입해 권리 포기를 강제할 권한은 없다.
조건부 시스템 제공은 사실상 정당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행위다. 이런 경우 선관위의 행위는 헌법소원 또는 행정소송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헌법기관이 민주주의 절차에 직접 개입해 기본권을 침해했다면, 그것은 단순한 행정 편의가 아니라 위헌 행위로 평가될 수 있다.
법적 구제 방안은 존재한다.
첫째, 경선 후보자는 직접적 이해관계자이므로 헌법소원의 청구인 자격을 가진다. 이 서약이 재판청구권을 침해했다는 논리다.
둘째, 민사소송을 통해 서약 조항 자체가 강행법규에 위반된 무효라는 확인을 구할 수도 있다. 이는 계약의 자유를 넘어선 기본권 침해라는 점에서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
셋째, 만약 중앙선관위가 조건부 제공을 했다면 행정소송을 제기할 수도 있다. 이 경우 행정처분 성격이 인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일반 당원이 원고 자격을 얻기는 쉽지 않다. 과거 판례는 당원 개인이 경선 결과에 대해 소송을 낼 수 없다고 판시한 바 있다. 그러나 이는 결과 불복 소송을 차단한 것이지, 헌법상 권리 침해에 대한 헌법소원까지 차단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정당 내부 민주주의를 보장하라는 헌법 제8조의 취지를 들어, 헌법소원 제기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법적 전망, 결과 무효로 이어질까?
만약 소송에서 이기더라도, 곧바로 선거 결과 전체가 무효가 되는 것은 아니다. 법원은 위법성이 선거 결과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판단할 때만 전체 무효를 선언할 수 있다. 현실적으로는 서약 무효 확인과 제도 개선 압박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그 자체만으로도 두 가지 효과가 있다.
첫째, 재발 방지 효과다. 법원이 서약 조항의 위헌성을 인정한다면, 앞으로 정당은 더 이상 후보자에게 권리 포기 각서를 요구하지 못할 것이다. 절차적 정당성을 보장하는 선례가 쌓이는 것이다.
둘째, 권리 구제를 통한 부정선거 증명 가능성이다. 서약 무효가 확인되면 후보자는 비로소 절차 검증을 요구할 권리를 되찾는다. 이 과정에서 자료·증거 확보가 가능해지고, 그 안에서 부정 여부가 드러날 수 있다. 즉, 소송은 단순히 경선 결과 무효를 위한 것이 아니라, 검증의 문을 열어 진실을 드러낼 수 있는 통로가 된다.
선거법 전문가인 한 변호사는 “서약 무효가 인정되더라도 바로 선거가 무효가 되는 것은 아니다”라면서도 “법원이 위법성을 인정하면 재발 방지 효과는 물론, 권리 구제를 통해 절차 검증이 가능해져 부정 여부를 확인할 통로가 열린다”고 설명했다.
정당은 국민에게 민주주의를 약속하는 조직이다.
그러나 내부적으로는 헌법적 권리를 제한하는 서약을 강제한다면, 그것은 민주주의 정당이 아니다. 불법적 강제를 제도화한 정당은 민주주의의 주체가 아니라 민주주의 파괴의 도구가 될 뿐이다.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자는 필요성은 모두가 인정했지만, 그 일을 맡을 이는 끝내 없었다는 우화처럼, 모두가 문제를 알면서도 침묵한다면 민주주의는 스스로 무너질 수밖에 없다.
이번 논란은 부정선거 주장이 아니다. 본질은 절차적 정당성을 보장하지 않는 구조다. 국민의힘은 물론, 중앙선관위 역시 답해야 한다. 왜 절차 검증의 권리를 봉쇄했는가. 불법을 강요하는 정당이 과연 민주주의 정당일 수 있는가. 이제 국민은 묻고 있다.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것인가.
이번 당 대표는 스스로 방울을 목에 걸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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