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남산의 부장들’의 한 장면.
황근 선문대 언론학 교수 몇 해 전에 개봉되었던 ‘남산의 부장들’이란 영화가 있다. 1979년 12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 전후에 있었던 권력 내부의 암투와 갈등을 다룬 영화다. 내용의 사실 여부나 영화의 완성도를 떠나, 관객들은 은밀하게 가려져 왔던 절대 권력을 속속들이 들여다보는 느낌 때문에 흥미를 더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많은 국민들에게 아니 최소한 영화를 보았던 사람들에게 미친 효과는 유신정권 몰락의 시발점이 미국에서 벌어진 이른바 ‘코리아게이트’와 미 의회 윤리위원회 청문회에서의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 발언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동안 몇몇 드라마나 회고록 등을 통해 유신정권 몰락이 한·미 관계 악화와 깊이 관련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지기는 했다. 하지만 당시 우리 국민 중에 미국 정가에서 벌어지고 있던 일련의 사건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아주 극소수였다. 물론 주한미군 철수나 인권 문제 등으로 한국 정부와 미국 간에 갈등이 있다는 분위기는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겠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구체적인 사건 내용을 거의 모르고 있었다.
모든 언론이 정권에 의해 철저히 통제되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정권의 강한 통제를 받고 있던 방송은 물론이고 신문들조차 나라 밖에서 일어나고 ‘국익에 반하는 소식’들은 거의 뉴스로 내보낼 수 없었다. 그나마 일부 신문들이 짤막한 단신이나 은유적으로 보도하는 경우는 있었지만, 거의 모든 국민들은 기사 이면에 있는 의미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처럼 깜깜이 정국이 된 직접 원인은 정권의 강력한 언론 통제였다. 하지만 정권의 위압에 밀려 언론사 스스로 자기 검열(self-censoring)에 함몰되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더구나 인터넷도 국경을 넘나드는 글로벌 매체들도 없었던 시절이다. 사실을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주한 미군부대에서 흘러 나오는 타임지나 뉴스위크를 구해봐야만 했다.
그런데 요즘 언론 보도를 보면 엄혹했던 50년 전 분위기가 다시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거의 모든 언론들이 천편일률 정부에서 배포하는 보도자료나 피상적 발표에 의존하는 ‘받아쓰기 보도’에 매몰되어 있는 느낌이다. 새 정부에 대한 허니문 기간 때문인지 아니면 자칫 ‘내란 동조범(?)’으로 몰릴 것이 두려워 자발적으로 통제하는 것 때문인지 가늠할 수 없다.
백번 양보해 그나마 용비어천가식 찬양 보도는 눈 감아줄 수도 있다. 하지만 사실관계 특히 국익과 관련된 사실들을 외면하는 것은 비판받지 않을 수 없다. 휴전선에서 벌어진 남·북한 교전은 며칠 지나서 아주 간단히 보도되었다. 무엇보다 대통령까지 미국을 방문해 벌인 관세 협상 내용은 지금까지도 전혀 밝혀진 게 없다. 공동 발표도 합의문도 없는 ‘완벽하게 합의된 기괴한 협상 타결’이 이루어졌다는 것만 알 뿐이다.
그럼에도 어떤 한국 언론도 합의 내용을 고사하고 협상 상황을 밝히려는 노력조차 안하고 있다. 아직 협상 중이어서 공개할 수 없다면, 최소한 협상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 것이라도 취재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더구나 한·미 양국 입장이 극명하게 다른데 어떤 언론도 한국 정부의 자화자찬식 발표 말고는 굳게 침묵하고 있다. 마치 정부가 원하는 시점에 원하는 내용만 보도하는 전형적인 전체주의 국가들의 언론 행태다.
지금 대한민국 국민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깜깜이 언론 시대”가 아니라 “아주 오래전에 있었던 그래서 기억 속에서조차 잊혀졌던 권위주의 언론 시대”를 다시 경험하고 있는 셈이다. 실제로 정부 여당은 공영방송의 보도 자율성을 위축시킬 수 있는 방송법을 개정한 데 이어, 징벌제 배상제로 언론의 권력감시 기능을 압박하는 언론중재법 개정도 추진하려 하고 있다.
어쩌면 대한민국 국민은 2025년 한미 안보협력이나 관세 협상 관련 내용들을 수십 년 지나 ‘남산의 부장들 속편’ 같은 영화를 통해 알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실제로 그럴 것 같지는 않다. 지금은 1970~80년대와 달리 무수히 많은 인터넷 매체와 최첨단 네트워크 시스템이 실시간으로 작동하고 있는 디지털 미디어 시대다. 철통같은 정보 통제를 통해 정권을 유지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아주 고루한 아니 유치 발랄한(?) 생각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