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과 1 속에 숨어든 간첩, 잡히지 않는 조직의 실체. 간첩은 있어도 간첩단은 없다는 현실. 한미일보 그래픽
대법, ‘민주노총 간부’ 사건서 2심 유지…개별 간첩행위만 확정, ‘비밀조직’ 실체는 불인정
25일 대법원은 ‘민주노총 간부 간첩’ 사건에서 검사·피고인의 상고를 모두 기각하며 2심 판결을 확정했다. 핵심은 “간첩은 맞다. 그러나 간첩단은 아니다”라는 결론이다. 점조직의 은밀성과 온라인 접선, 수사 권한 재편 이후의 난맥이 겹치며 조직 실체 입증의 문턱이 더 높아졌다는 사실이 이번 판결로 다시 확인됐다.
대법원 제2부는 사건번호 2025도8823에 대해 원심을 그대로 확정했다. 전 민주노총 조직쟁의국장 A씨는 징역 9년 6개월·자격정지 9년 6개월, 전 보건의료노조 조직실장 B씨는 징역 3년·자격정지 3년이 확정됐다. 반면 전 금속노조 부위원장 C씨와 모 연맹 조직부장 D씨는 무죄가 확정됐다. 대법원은 원심의 사실인정이 자유심증주의 한계를 벗어나지 않았고 법리오해도 없다고 판단했다.
사건의 궤적을 보면 1심–2심–대법원의 판단 차가 분명하다. 1심(수원지법 형사14부, 2024년 11월 6일)은 북한 문화교류국 지령문·보고문 등을 근거로 ‘지하조직’ 실체를 폭넓게 인정하며 A씨에게 징역 15년 등 중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2심(수원고법 형사2-3부, 2025년 5월 15일)은 “문건 표현만으로는 조직 실체를 인정할 수 없다”며 형량을 대폭 낮췄다. 대법원은 이 판단을 그대로 추인했다.
이번 판결은 개별 간첩행위(해외 접선, 지령·보고, 특수잠입·탈출 등)는 증거가 확보되면 처벌할 수 있지만, 간첩단 성립을 위해서는 명단, 정기적 회합, 자금 흐름, 지휘체계 같은 지속적 운영의 실증이 필요하다는 점을 다시 확인했다. 문건과 진술만으로는 ‘합리적 의심 없는 증명’에 이르기 어렵다는 기준이 자리 잡은 것이다.
과거 사건과의 비교
과거 판례와 비교하면 이번 사건의 흐름은 더욱 선명하다. 왕재산 사건(2011)에서는 북한 지령을 받아 활동한 조직을 법원이 ‘지하당’으로 인정해 중형을 선고했다. 일심회 사건(2006) 역시 지도부와 위계적 체계를 일부 인정했다. 그러나 이번 사건에서는 조직 운영의 객관적 물증이 없다는 이유로 간첩단 성립을 부정했다. 대공수사 권한 분산과 강화된 증거주의가 반영된 결과다.
새로운 위협, 중국 스파이와 사이버 간첩
오늘날 간첩 활동은 북한에 국한되지 않는다. 최근 한국 반도체 기술을 겨냥한 중국발 산업 스파이 사건들이 적발됐고, 국방 연구기관을 노린 해킹 시도도 빈번하다. 보안 전문가들은 “북한은 체제 유지형 정치공작, 중국은 산업·경제형 첩보에 집중한다”며 “국제 공조 없이는 사이버 증거 확보가 불가능하다”고 경고한다. 이번 판결의 법적 한계가 중국 스파이 대응에서도 반복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대공수사 전문가들이 지적한 4대 보완 과제
대공수사 전문가들은 “이번 판결은 간첩은 처벌할 수 있어도 간첩단 입증은 어렵다는 현실을 보여줬다”며 네 가지 보완책을 제시했다.
첫째는 조직 실체 인정 요건의 법제화다. 한 전직 국정원 간부는 “재판부 성향에 따라 같은 증거도 달리 해석된다”며 “지하조직 판단 지표를 법률에 명확히 규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둘째는 정보와 수사의 공조체계 복원이다. 국정원 대공수사권 이관 이후 장기 잠복과 국제 공조, 대북 정보망 활용이 약화됐다는 지적이 이어진다. 한 검찰 출신 인사는 “경찰, 국정원, 검찰이 따로 움직이면 간첩단 입증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며 “정보를 증거로 전환하는 합동 프로토콜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셋째는 사이버 간첩 대응 역량 강화다. 최근 간첩 활동은 암호화 메신저, 가상자산, 다크웹을 통한 침투가 주류를 이룬다. 한 보안 전문가는 “북한뿐 아니라 중국 산업스파이까지 온라인으로 침투한다”며 “블록체인 추적과 디지털 포렌식 역량을 제도적으로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넷째는 장기 잠복·추적수사 인프라 확충이다. 점조직 구조 특성상 조직을 드러내려면 수년 단위 추적과 해외 잠입수사가 필요하다. 그러나 현행 수사체계는 단기 사건 처리 중심이다. 한 경찰 관계자는 “안보 사건 전담 장기수사팀을 만들고 안정적 예산을 보장하지 않으면 ‘간첩은 잡아도 간첩단은 못 잡는’ 현실은 반복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번 판결은 개인 간첩행위 처벌의 실효성을 확인하면서도, 조직 실체 입증의 엄격 기준을 다시 못박았다. 그러나 북한뿐 아니라 중국발 스파이와 사이버 공작이 심화되는 현실에서 제도 보완 없이는 “간첩은 있어도 간첩단은 없다”는 역설이 장기화될 수 있다.
안보 공백을 줄이는 동시에 인권 침해를 막는 견제 장치가 필요하다. 한국 사회가 풀어야 할 과제는 안보와 인권이라는 두 가치를 균형 있게 지켜내는 정교한 제도 리모델링이다.
제도 개선을 막는 자가 어쩌면 진짜 간첩이라는 비판을 세겨야 할 시점이다.
※ ps. 인터뷰에 응한 전문가들은 한결같이 익명을 원했다. 이들은 누구의 눈치를 보는 것일까. 간첩 수사의 현실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함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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