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종근 전 육군 특수전사령관이 지난 3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윤석열 전 대통령의 내란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목차]
① 홍장원… ‘지렁이’가 말하지 못한 진실
② 곽종근… 계엄 당일 군의 판단과 국회의 실제 상황
③ 체포조 명단… 공개 전후 무엇이 달라졌는가
④ 내란죄의 법적 구조… 왜 성립하지 않는가
⑤ 종합… 그날의 진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12‧3 비상계엄과 윤석열 전 대통령에 대한 내란 우두머리 재판에서 곽종근 전 특전사령관의 증언은 사건의 흐름과 그에 대한 판단 전체를 좌우하는 핵심 변수다. 그러나 곽종근이 기억하는 내용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기억이 어떤 시간을 거쳐 형성되고 변화했는지에 관한 정밀한 분석이다.
특히 “국회의원을 끌어내라”는 것이 실제 대통령의 발언이었는지 아니면 곽종근의 해석과 공포, 또는 정치적 압박 속에서 재구성된 것인지의 여부는 재판부가 내란죄 성립 가능성을 판단할 중심축이다.
곽종근의 진술은 처음부터 이렇게 선명하지 않았다. 변화의 출발점은 2024년 12월6일 있었던 김병주·박선원 더불어민주당 의원과의 영상 인터뷰다. 이 인터뷰는 ‘인원’이냐 ‘의원’이냐를 두고 논란에 휩싸인 바 있다.
하지만 이런 논란을 잠재운 것은 이후 공개된 곽종근의 지인과의 통화 녹음이다. 곽종근의 심경이 왜, 어떻게 변화했는지 통화 내용에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통화 시점은 김병주·박선원 의원과의 인터뷰 전날인 12월5일이다.
통화에서 그는 “누군가가 나를 내란으로 엮겠단다” “살려면 말하라고 한다” “양심선언을 하라고 압박한다”는 표현을 반복했다. 극도의 불안과 공포가 묻어나는 대목이다. 정황상 그가 말한 ‘누군가’는 비상계엄을 내란으로 몰아가려는 자들 중의 하나임을 쉽게 추정할 수 있다. 이들에게 협박을 당하고 있다고 친구에게 하소연하는 내용이다.
다음 날 인터뷰에서 곽종근의 워딩은 완전히 달라졌다. 기존에는 “인원을 통제하라” “상황을 정리하라”는 수준의 모호한 표현이었지만, 인터뷰에서 그는 “국회의원을 끌어내라” “문을 부수고라도 들어가라는 취지였다”고 말했다.
하루 만에 진술이 극단적인 형태로 변한 것이다. 단순한 기억 보완이나 표현 차이로 설명하기 어려운 변화다. 전날 통화에서 드러난 압박감과 인터뷰 직전까지 이어진 흔들리는 심리가 결합해 진술이 특정 방향으로 ‘정렬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는 이유다.
법정에서는 곽종근의 진술과 다른 군 지휘관들의 진술이 정면으로 충돌했다. 곽종근은 “12월4일 0시30분경 윤석열 전 대통령이 비화폰으로 전화해 ‘국회의원을 끌어내라’고 지시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대통령 측은 “곽 전 사령관이 대통령과 통화하기 전에 이미 그와 같은 내용을 부하에게 하달했다”고 반박했다. 지시의 실재 여부와 시점을 둘러싼 충돌이다. 시점이 바뀌면 진술의 구조 자체가 무너진다.
즉, 곽종근의 지시가 대통령과 통화하기 이전에 하달됐다면, 대통령 지시라는 건 사후에 덧붙여진 설명이 된다. 이 경우 진술의 신빙성은 크게 흔들릴 수밖에 없다.
이상현 1공수여단장은 “0시50분에서 1시 사이에 곽 사령관이 보안폰으로 전화해 ‘대통령께서 문을 부수고라도 의원들을 끌어내라고 하셨다’고 말했다”고 증언했다. 그는 군의 관례대로 “대통령님께서 그렇게 지시하셨습니까?”라고 복명복창했고, 곽 종근은 “응”이라고 자신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고 한다.
‘의원을 끌어내라’는 내용이 여단장에게까지 전달된 사실 자체는 어느 정도 확인된다. 그러나 그 지시 내용의 출발점이 어디인지, 대통령의 직접 지시였는지 곽종근 자신의 판단이었는지, 혹은 통화 내용을 확대 해석한 것이었는지는 여전히 불명확하다.
하부 지휘관들의 진술은 더 복잡하다. 1공수 지휘관 일부는 “문을 부수고 의원들을 끌어내라는 지시를 들었다”고 진술했다. 반면 707특수임무단 단장이었던 김현태 대령은 초기에는 그런 취지의 말을 들었다고 했다가 법정에서는 “직접 그 표현을 들은 적은 없다”고 진술을 바꿨다. 또 다른 장교들은 당시 임무를 “국회 질서 유지” 또는 “시설 보호”로 이해했다고 말했다. 일부는 “북한 오물풍선 대비 출동으로 알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상부의 문장은 강하고 선명하지만, 하부의 인식은 사람에 따라 각각 다르게 흩어져 있다. 이 비대칭 구조는 지휘선인 ‘대통령→사령관→여단장→예하부대’ 중 어느 지점에서 문장이 왜곡되거나 강화됐는지를 판단할 핵심 단서다.
그러나 곽종근의 진술이 사실이라고 가정해도, 그것이 곧바로 내란죄의 구성 요건으로 이어지는가 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내란죄 성립에는 네 가지 요건이 필요하다. 국헌문란을 목적으로 한 명확한 폭력 지시, 그 지시가 실제 실행 준비로 이어진 사실, 폭동의 현실적 위험성, 지시와 실행 사이의 인과관계다. 이 요소들이 단계적으로 충족돼야 한다.
곽종근의 진술을 이 요건에 대입하면 어떤 요소도 충족되지 않는다. 대통령의 직접 지시를 입증할 문서나 통신 기록은 없고, 지휘관들의 진술도 시점과 내용이 서로 어긋난다. 군의 실제 행동은 내란 실행과는 거리가 멀었다. 국회 본관에 대규모 병력이 집결하지 않았고, 폭력적 진입을 위한 무장 채비도 없었다. 의원 체포나 구금에 준하는 실력 행사 준비의 정황 역시 발견되지 않았다.
지시—집행—실행이라는 내란 성립의 필수 사슬은 어떤 지점에서도 이어지지 않는다. 곽종근의 주장대로 대통령의 지시가 있었다 해도, 그 지시가 하달·집행·실행의 단계로 연결된 흔적은 없다. 반대로 곽종근의 지시가 대통령과의 통화 이전에 있었다면 그의 진술 구조는 설명이 되지 않으며 설득력을 잃게 된다. 여단장과 장교들의 증언은 서로 다르고, 부대의 실제 움직임은 평시 통제 임무 수행에 가까웠다.
계엄 당일 중계된 국회 본관 앞 영상은 이를 더 확실히 방증해 준다. 특전사 요원들은 착검도 하지 않았고 무장도 갖추지 않았다. 국회 앞에서 민간인들에게 둘러싸여 제압되거나 밀려나는 모습이 대부분이었다. 폭동의 실질적 위험성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결국 곽종근의 증언은 계엄 당일 군 지휘관들 사이에서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 그 대화가 어떻게 감정과 압박, 해석과 오판 속에서 변형됐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대통령에게 내란 우두머리 혐의를 적용하기에는 사실적·법적으로 명확히 괴리가 있다. 진술의 급격한 변화, 뒤바뀐 시점, 불분명한 지시의 출처, 실질적 실행 흔적의 부재는 내란죄 구성 요건과 거리가 멀다.
다음 편에서는 곽종근 진술과 함께 논란의 중심에 놓인 ‘체포조 명단’과 국회 진입 시나리오의 실체를 면밀히 검증하며, 내란 시나리오의 마지막 고리를 살펴볼 예정이다.
#곽종근 #12·3비상계엄 #내란우두머리재판 #지인통화녹음 #의원끌어내라논란 #진술변화 #특전사 #계엄군실제 #국회상황 #한미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