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 당일 국회 본관 앞으로 다가가는 계엄군. 착탄도 착검도 없는 상태로 국회 정문으로 걸어서 접근 중이다. 12.12 비상계엄 당시와 확연하게 비교가 된다. 이 영상은 당시 실시간으로 생중계가 됐었다. [국회방송 영상 캡처]
[목차]
① 홍장원… ‘지렁이’가 말하지 못한 진실
② 곽종근… 계엄 당일 군의 판단과 국회의 실제 상황
③ 체포조 명단… 공개 전후 무엇이 달라졌는가
④ 내란죄의 법적 구조… 왜 성립하지 않는가
⑤ 종합… 그날의 진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체포조 명단은 처음부터 문서보다 이미지로 존재했다. 군 어디에서도 ‘체포조 편성’이라는 문구는 발견되지 않지만, 정치권과 일부 언론은 이 단어 하나로 대통령이 국회를 장악하려 했다는 이야기를 빠르게 완성했다.
그러나 조직 구조를 하나씩 분해하면 그 이야기는 현실적 기반을 잃는다. 군의 실제 권한과 작전 체계 어디에도 ‘체포조’를 가능하게 하는 요소는 없으며, 실행된 사실 또한 존재하지 않았다.
결국 남는 질문은 체포조가 존재했는가가 아니라, 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존재하는 것처럼 조립됐는가라는 점으로 옮겨간다.
체포조라는 용어는 군 내부에서 사용된 적이 없다. 특전사령부·방첩사령부·정보사령부 어떤 지휘 라인에서도 이 단어를 들었다는 진술은 나오지 않았고, 오히려 지휘관들은 “그런 지시는 없었다”, “국회 진입 취지도 아니었다”고 입을 모았다.
방첩사는 구조적으로 체포나 물리력 행사 권한이 없고, 정보사는 해외·대북 정보기관이어서 국내 정치와 무관하며, 특전사는 민간인을 상대로 체포 작전을 수행하는 조직이 아니다. 그럼에도 누군가가 이 세 조직의 기능을 뒤섞이면서 ‘체포조’라는 정치적 이미지가 만들어 냈다는 게 윤석열 전 대통령 변호인측의 설명이다.
실제로 방첩사는 동향 파악과 위험요인 분석, 특정 인물 위치 식별 등을 담당하는 조직이지만 영장 없는 위치 추적은 물론 체포도 할 수 없다. 여기에 구금시설이 없는 이유 자체가 그들의 임무가 체포나 연행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보사는 더더욱 국내 정치와 무관한 해외·대북 정보 기관이며, 박선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정보사 요원 실종설’ 같은 이야기는 군 구조와 전혀 맞지 않는다. 특전사 역시 국회의원 체포와는 무관하고, 하달된 임무 역시 시설 보호 대비 수준이었다는 점에서 지휘관 진술이 대체로 일치한다.
여기에 당시 합동수사본부가 구성되지 않아 수사·체포·연행을 위한 법적 절차 자체가 열리지 않았다는 점까지 고려하면, 군이 실제로 할 수 있었던 일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영장 없는 위치 추적은 불가능하고, 체포는 더더욱 불가능하며, 지휘·보고 체계 어디에도 강제력 행사 계획을 뒷받침하는 문서는 남지 않았다. 즉, 실행 가능성이 없는 상황에서 실행된 작전이 존재할 수는 없는 것은 당연한 일로 여겨진다.
‘체포조’ 프레임이 크게 확산된 데에는 정치권의 발언과 뒤따른 조각들의 결합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김병주 의원의 ‘곽종근 특전사령관 인터뷰’, 박선원 전 비서관의 ‘요인 암살설·체포조 운용설’이 서사의 골조를 만들었고, 이 프레임 위에 홍장원 전 국정원 재1차장의 이른바 ‘지렁이 메모’가 덧붙여지며 이야기는 더욱 거대해졌다.
특히 곽 전 사령관의 입장 변화는 논란의 성격을 바꿔놓았다. 초기 진술은 ‘그런 취지는 아니다’, ‘압박감 정도였다’는 모호한 수준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발언은 “대통령이 끌어내라고 지시했다”는 직접적 주장을 포함하는 형태로 비약했다.
국회 본관으로 진입한 계엄군(10여명으로 추정)이 국회 관계자들이 작동시킨 소화기 분무를 피해 대기 중인 모습. 이날 다친 부대원들은 상당수 였지만 민간인 사상은 없었다. [국회방송 영상 캡처]
그러나 이 발언을 뒷받침할 군 내부 기록은 단 한 건도 발견되지 않았다. 작전명령서, 상황보고, 지휘통신 기록, 회의록 등 계엄사 라인의 기록 어디에서도 그와 같은 지시가 존재했다는 증거는 없다. 지휘관·장교 누구의 진술과도 연결되지 않는 유일한 주장만이 홀로 남아 있다.
하지만 지금 재판에서는 핵심 쟁점이 되고 있다. 대통령의 직접 지시 여부를 놓고 공방이 벌어지는 이유는 “지시가 실제로 존재해서가 아니라, 그 지시를 입증할 물증이 전혀 없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기록이 없으니 주장만 남고, 주장이 강화되니 정치적 서사가 커지는 구조에 가깝다는 설명이다. 물증이 없는 상태에서 곽 전 사령관의 진술만 확대됐고 이 진술이 김병주·박선원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의 서사와 결합하면서 ‘체포조’ 논란은 사실보다 프레임이 더 강력한 힘을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런 판단의 근거는 세 가지다.
첫째, 체포조가 존재했다면 이를 뒷받침할 최소한의 작전 문서나 지휘 기록이 남아 있어야 한다. 그러나 남아 있는 것은 그와 반대되는 자료와 정황들뿐이다.
두 번째, 방첩사·정보사·특전사 어떤 조직도 체포·강제력 행사 권한이 없었고, 합동수사본부 부재로 법적 절차 역시 시작되지 않았으며, 지휘관들의 현장 이해 또한 시설 보호 중심이었다는 사실은 법정 증언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결국 이 조합으로는 체포조가 성립할 조건이 현실적으로 없었다.
따라서 마지막으로 남는 질문은 ‘국군통수권자인 대통령과 국방부 장관이 과연 이런 사실을 몰랐겠느냐’는 점으로 이어진다.
국회 주변에 투입된 병력은 300명도 안 되는 사실상 비무장 상태의 소부대였고, 이 병력으로 국회 계엄 해제를 막거나 국회의원을 강제 연행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면, 그 판단 자체가 군사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불가능하다고 단정할 사안이다. 군사·법률·지휘체계 어디에서도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가 없고, 기록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존재한 것은 ‘군의 작전’이 아니라 그 작전이 있었다고 믿게 만든 ‘정치적 이야기’였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이제 다음 질문은 정치가 만든 체포조 서사가 ‘어떻게 법정에서 내란이라는 이름을 갖게 됐는지’이다.
④편에서는 이 논란이 실제 법률 체계에서 어디까지 성립 가능한지, 내란의 구성요건과 판례 기준을 통해 정치적 프레임과 법적 현실의 간극을 짚어본다.
※ 이 기사는 내란 관련 재판에서 드러난 증언들과 전문가들의 조언을 종합해 분석한 본지의 결론임을 알립니다
#12월3일 #체포조논란 #방첩사 #정보사 #특전사 #곽종근진술 #홍장원메모 #내란프레임 #군사사실검증 #한미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