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월 베네수엘라 카라카스에서 니콜라스 마두로가 V자를 그려 보이고 있다. [EPA=연합뉴스]
마두로가 특수부대 델타포스에 의해 체포되어 신속히 미국으로 압송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세상이 갑자기 어제까지와는 달라진 것 같았다. 세상이 마두로 체포 이전과 이후로 갈렸다고나 할까. 그만큼 마두로 체포의 소식은 놀라웠고 세상의 빛깔을 급변시켰다.
어제까지 모든 것은 불확실했다. 세상은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고 사태의 결말이 어디로 귀착될지 확신할 수 없었다. 역사에서 때로 악이, 불의가, 거짓이 흔히도 승리를 거두었던 일들을 떠올려야 했다. 우울과 안타까움과 슬픔의 연속이었다.
독재자의 최후는 왜 희극적일까
나라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우리가 겪는 일이 그대로 이렇게 끝나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키웠다. 판결이 언제 내려질 것이라 했고 또 다른 구속영장이 발부되었다고도 했다. 모든 것이 부당했다.
최후가 가까워진 독재자들은 특별히 희극적으로 보인다. 채플린 영화 ‘위대한 독재자’의 한 장면. [사진=위대한 독재자]
상식의 밝은 눈으로 보면 거짓임이 너무나 분명한데 법복 입은 눈들의 척도는 전혀 달랐다. 스무 번, 서른 번을 기대하고 또 설마 했건만 그때마다 작은 귀결점들은 고통과 슬픔의 결과표를 건넸다.
세상에, 마두로가 그런 세상을 뒤바꾸어 버렸다. 군사기지 안전가옥에 숨어 있었는데도 추적을 피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 안에서도 ‘세이프 룸’에 들어가 체포를 피할 수 있었는데, 그러지도 못했다고 했다.
옷에 피가 얼룩진 채 끌려 나오는 마두로, 발을 저는 마두로, 나이키를 입은 마두로, 헬리콥터로 배에 이송된 마두로, 어느새 뉴욕 인근의 시설로 옮겨지는 마두로, 카메라를 향해 ‘엄지척’을 하며 여유를 부리는 마두로…… 마두로는 희망이요 빛으로 화했다.
최후가 가까워진 독재자들은 특별히 희극적으로 보인다. 채플린 영화 ‘위대한 독재자’에 등장하는 열혈 웅변가처럼, 자신의 임박한 최후를 모르는 독재자는 참으로 귀엽고 우스꽝스럽다.
한 주먹으로 책상을 꽝 내려치며 호통을 치는 마두로, 외국 정상이 보내왔다며 값싼 물건을 보여주며 자랑하는 마두로, 군복을 입고 기염을 토하며 자신만만해 하는 마두로, 아직은 자기 앞에, 밑에 모여 있는 사람들, 권력의 인형 증인들을 굽어보며 확신에 차서 조국의 희망찬 미래를 가리키는 마두로, 벌거벗은 임금님처럼 아무도 자신의 비밀을, 치부를 모르는 줄 알고 낄낄거리는 마두로, 그러다가도 곧 표정을 근엄하게 바꾸어 보는 마두로….
이제 마두로는 어떻게 될까?
노리에가·가다피·차우세스쿠·차베스 그리고 마두로
파나마의 노리에가는 미군이 쳐들어오자 바티칸 대사관으로 달려가 닫힌 문을 두드렸다. 문이 열렸고 그는 살길이 열릴 것을 기대했다. 그곳은 안정된 망명처가 될 수 없었다. 몇 날 며칠의 소동 끝에 미국으로 잡혀간 노리에가는 40년 형을 받았고 미국, 프랑스, 파나마 등으로 감옥살이를 전전하다 최후를 맞았다.
미국에 생포된 니콜라스 마두로가 뉴욕 브루클린의 메트로폴리탄 구치소로 이송되면서 그를 호위한 법 집행관과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유엔뉴스] ‘녹색혁명’의 가다피에게도 비참한 최후가 기다리고 있었다. 리비아를 장장 42년간이나 통치한 가다피는 고향의 콘크리트 파이프 배수로에 숨어 있다 반정부군에 의해 발견되고 말았다. 말년의 가다피는 권력의 맛에 취해 차라리 마약쟁이처럼 보였다.
헬리콥터로 도망가려다 실패한 루마니아의 차우세스쿠는 24년인가를 통치했는데 법정의 냉정한 판결로 최후를 맞이했다.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도 부시가 주도한 이라크전쟁의 포로가 되었고 법정의 판결로 세상을 떠났다.
마두로는 아직 기운이 팔팔하다. 자신은 아직 대통령이고 전쟁포로일 뿐이란다. 그는 정말 대통령일까? 대통령 행세를 해온 게 아닐까? 누가 그를 국민의 대표로 선출했나? 그 일을 해준 건 기계가 아니던가? 가짜 권력을 잃어버린 그는 한갓 범죄자에 지나지 않는 게 아닌가?
자신의 운명을 바쳐 웃음을 선사해 준 마두로, 자신의 희극적 운명극에 아내마저 배역으로 출연시킨 마두로 덕분에 정의를 목마르게 기다리는 사람들은 며칠이나마 명랑할 수 있었다. 이것만 해도 충분히 기적 같다. 그러나, 마두로는 진정 우리에게 무엇을 주었나?
일 년 동안 사람들은 ‘그것’이 있느니 없느니 하고 갑론을박했다. 요즘 같은 세상에, 대명천지 21세기에 어떻게 그런 일이 있겠느냐 했다.
‘안경’ 낀 선관위원장이 우리를 그렇게 못 믿느냐고, 딱하다는, 결백한 표정을 짓고 혀를 끌끌 찼다. 마두로가 잡혀가자 ‘그것’이 발설하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있었던 일이 되었다.
레거시 미디어들은 여전히 ‘그것’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마두로가 잡혀간 것은 석유를 향한 미국의 욕망 때문이라고, 마약 카르텔 때문이라고 한다. 패권주의가 발동된 것이라고도 한다. 국제법 위반 운운하며 트럼프의 ‘행태’를 우려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이러한 침묵을 뛰어넘어 순식간에 사람들의 머릿속에 있었던 일로 똬리를 틀었다. 마두로의 베네수엘라가 그랬다면 여기서도 그런 일이 있었을 것임에 틀림없다는, 어떤 등식이 성립해버린 것이다.
마두로는 전산개표 조작으로 시작된 자신의 정부를 ‘국민주권정부’라고 했다. 마두로의 동상을 무너뜨리며 환호하는 베네수엘라 국민들은 이 슬로건이 얼마나 허위적인 것이었는지 입증해 보였다.
베네수엘라에서 그랬다면 한국의 ‘국민주권정부’는 어떠한가? 이 정부의 베네수엘라 벤치마킹은 사람들로 하여금 베네수엘라에서 벌어지는 일을 평행이론적으로 해석할 수 있게 했다.
우고 차베스로부터 시작된 베네수엘라의 ‘볼리바르 혁명’, 그 ‘21세기 사회주의’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그가 집권한 것은 냉전체제가 끝난 후 약 20년이 되는 시점이었다.
현실에 구현된 사회주의란 국민에 대한 약탈체제에 불과하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게 된 역사적 상황 속에서 차베스는 ‘새로운’ 사회주의, ‘민주사회주의’, ‘선거 사회주의’를 내걸고 반제국주의 노선을 걸었다. 석유산업을 제국의 자본에게서 ‘회수’하면서 빈민들을 위한 복지를 약속했다.
‘혁명’이 위기를 맞을 무렵 차베스는 ‘운 좋게도’ 신의 부름을 받고 사람들 곁을 떠났다. 인기 없는 마두로가 과업을 물려받았다. 마두로 체제는 처음부터 ‘혁명’의 위기를 검·경에 의한 강압 통치, 정적 숙청과 주민학살, 21세기식 부정선거로 돌파하려 했다.
부정선거로 돌파구 찾은 마두로
낡고 반시대적인, 반민중적인 독재체제들과 국제적 네트워크를 결성해서 위기의 권력을 유지하려 했다. 최근에 터져 나오는 뉴스들은 그 동맹자들이 심지어 미국 내부에서도 찾아질 수 있었음을 말해준다. ‘스마트매틱’이니 ‘도미니언’이니 하는 전자개표기들이 이 국제적 네트워크 속에서 ‘제 기능’을 발휘했다.
베네수엘라의 전직 정보당국 최고 책임자 우고 카르바할 바리오스(왼쪽)가 “베네수엘라 정권이 미국에서 간첩 활동과 부정선거에 가담했다”고 자백하는 편지를 도널드 트럼프(오른쪽) 미국 대통령에게 2025년 12월2일 전달한 사실이 밝혀졌다. 가운데가 니콜라스 마두로. [사진=댈러스익스프레스]
마두로의 체포는 자신을 여전히 급진주의적이라고 믿는 이들에게 깊은 정신적 충격을 선사했다. 소멸된 체제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 교조적 사회주의자들, ‘전위당’의 권능에 여전히 매달리는 자들, 대중을 위한다면서 그들의 권리를 차압해서 자기 것으로 만든 자들, 정치적 올바름을 추구한다고 도그마화한 진리를 독점하려 하는 자들, 세대와 성별과 계급 사이의 유대와 이해 대신에 적대와 증오와 반목으로 세상을 뒤바꾸려는 이들, 그들에게 마두로의 베네수엘라는 ‘제3의 길’이었다. ‘멸망’한 ‘사회주의’와 다른 별종의 가능성이었다. 이 ‘가능성’이 ‘부당하게’ 체포되어 이송되고 재판정에 세워진 것이다.
‘1인 1표’의 선거제를 가리켜 부르주아 민주주의라 지칭들 한다. 자본과 국가와 관료에 의해 관리·통제되는, 부르주아를 위한 민주주의일 뿐, 민중의, 대중의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것쯤이야, 원대한 이상을 위해서는, 뛰어넘을 수만 있다면 그래도 좋은 것이다. 숫자를 이겨낼 수 없다면, 창조할 수 있다면 그럴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까지 심각한 죄악은 아닌 것이다. 국민이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할 뿐, 정치에 고정된 선악이란 본디 없는 것이다.
나는 이 ‘절망’을 이해할 수 있다. 마두로가 체포된 것이 꼭 자신이 체포된 것처럼 고통스러운 이들을 동정할 수 있다. 베네수엘라에서 벌어진 일이 바로 이 나라에서 벌어지는 일이기도 한 때문이다.
서울대 교수, 시인

◆ 방민호 교수
문학박사, 서울대 국문과 교수. 계간문학잡지 ‘맥’ 편집주간(2022년~)이자 시인, 소설가, 문학평론가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저서로 ‘연인 심청’(2015), ‘통증의 언어’(2019), ‘한국비평에 다시 묻는다’(2021), 서울문학기행(2024)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