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차>
Ⅱ부. 불신은 어떻게 확산되고 고착되는가 (6~10편)
⑥ 언론, 불신을 설명하지 못한 중재자
⑦ 정치, 선택 없는 말의 정치
⑧ 경제, 숫자는 많아졌는데 신뢰는 사라졌다
⑨ 교육, 판단 능력을 길러야 할 제도의 붕괴
⑩ 노동, 보호가 아니라 위험이 된 제도
경제 정책은 본질적으로 기대를 다루는 영역이다. 성장률과 물가, 고용 같은 지표는 모두 현재를 설명하기 위한 수치이지만, 시민과 시장이 궁극적으로 묻는 질문은 하나다.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경제에 대한 신뢰는 지금의 숫자가 아니라, 미래에 대한 예측 가능성에서 만들어진다.
오늘의 경제 담론은 과거 어느 때보다 많은 정보를 제공한다. 통계는 세분화됐고, 분석은 실시간으로 쏟아진다.
그럼에도 경제에 대한 신뢰는 좀처럼 회복되지 않는다.
이유는 단순하다. 숫자는 늘어났지만, 그 숫자가 어떤 판단으로 이어져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은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경제 정책이 신뢰를 잃는 결정적 순간은 지표가 나쁠 때가 아니다.
오히려 정책 당국이 반복해서 “일시적”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때다.
물가 상승도 일시적, 경기 둔화도 일시적, 환율 변동도 일시적이라는 설명이 누적될수록 시장과 시민은 정반대로 받아들인다.
언제 정상으로 돌아올지 알 수 없다는 뜻으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이때 경제 불신은 성과의 문제가 아니라 예측의 문제로 전환된다.
사람들은 지금의 성장률보다, 다음 분기와 내년의 방향을 알고 싶어 한다.
그러나 정책 설명이 사후 해명에 머물면 기대는 관리되지 않고 방치된다. 설명은 많아지지만 기준은 모호해진다.
최근 몇 년간 반복된 정책 장면들이 이를 보여준다.
금리 인상기에는 “가계 부담이 크지 않다”는 설명이 이어졌지만 체감은 달랐다.
환율이 급등할 때는 “외환 건전성은 양호하다”는 발표가 나왔지만 시장은 먼저 불안을 가격에 반영했다.
부동산 대책이 나올 때마다 “시장 안정이 목표”라는 말이 반복됐지만, 다음 정책이 언제 뒤집힐지에 대한 예측은 제공되지 않았다.
이 불일치는 음모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다.
정책은 안정을 강조하지만, 시장은 변화를 먼저 계산한다.
두 언어가 어긋날 때 정책 메시지는 신호로 작동하지 못하고, 시장의 반응은 과잉 해석으로 치부된다. 그 사이에서 신뢰가 빠르게 소진된다.
숫자가 많아질수록 오히려 혼란이 커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수치는 과거를 설명할 수는 있지만 미래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경제 정책이 “어떤 조건에서 어떻게 움직일 것인지”를 명확히 제시하지 못할 때, 지표는 판단의 근거가 아니라 또 하나의 해석 대상이 된다.
이 구조는 가계와 기업의 행동을 바꾼다.
장기 투자는 줄어들고 단기 대응이 늘어난다. 계획은 보수적으로 설정되고 위험은 개인이 떠안는다.
정책이 불확실성을 줄여주지 못할수록, 경제 주체들은 정책 자체를 새로운 위험 변수로 간주하게 된다.
불신이 깊어질수록 정부는 더 많은 숫자를 제시한다.
그러나 숫자의 증가는 설명의 부족을 대체하지 못한다. 왜 이 지표가 중요한지, 어떤 기준에서 정책이 조정되는지, 실패를 어떻게 수정할 것인지는 여전히 모호하다.
복잡한 모델과 전문 용어가 늘어나지만, 시민이 의사결정에 활용할 수 있는 기준은 오히려 줄어든다.
경제는 심리라는 말이 자주 인용되지만, 더 정확한 표현은 경제가 기대의 문제라는 것이다.
기대가 관리되지 않는 사회에서 불신은 비합리적 감정이 아니라 합리적 선택이 된다. 믿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대비하기 위해서다.
경제 불신은 성과의 부족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예측 가능성을 제공하지 못한 정책 설명의 실패에서 시작된다.
다음 편(⑨교육, 판단 능력을 길러야 할 제도의 붕괴)에서는 불신이 세대를 넘어 교육 제도에 어떻게 전이되었는지, 그리고 왜 교육이 더 이상 신뢰의 사다리가 되지 못하는지를 살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