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차>
Ⅰ부. 불신의 구조를 해부하다 (1~5편)
① 불신은 감정 아닌 학습
② 확증편향 사회의 등장
③ 정책이 안정 장치 아닌 위험 변수
④ 불신 사회의 다섯 가지 징후
⑤ 해법은 신뢰 회복 아닌 불신 관리
정책은 본래 불확실성을 줄이기 위한 장치다. 규칙을 예측 가능하게 만들고, 위험을 분산시키며, 개인의 선택 비용을 낮추는 역할을 맡아 왔다.
정책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사회 구성원에게는 하나의 안전 신호였다. 내일의 규칙이 오늘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그 믿음이 정책의 핵심 기능이었다.
그러나 오늘의 사회에서 정책은 점점 다른 의미로 인식된다.
안정 장치라기보다 추가적인 위험 요인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는 정책이 사라졌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정책은 더 자주 등장했고, 더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문제는 그 개입이 일관된 방향과 기준을 유지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정책은 많아졌지만, 예측 가능성은 오히려 줄어들었다.
정책이 위험 변수로 인식되기 시작한 순간은 분명하다. 변화가 예고되지 않고, 조정의 기준이 설명되지 않으며, 결과에 대한 책임이 남지 않을 때다.
이때 정책은 보호 장치가 아니라 외부 충격으로 작동한다. 개인과 기업은 정책을 신뢰의 근거가 아니라, 회피해야 할 리스크로 계산하기 시작한다.
이 과정은 학습 효과를 낳는다.
사람들은 정책의 취지를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 “언제든 바뀔 수 있다”는 전제를 먼저 세운다.
정책의 방향보다 정책 변화 자체가 위험으로 인식되는 사회가 만들어진다. 정책은 더 이상 계획의 기준이 아니라, 변수 목록의 하나로 편입된다.
정책 실패는 언제든 발생할 수 있다. 실패 그 자체는 정책 신뢰를 즉각 무너뜨리지 않는다.
문제는 실패 이후다. 왜 그런 판단이 내려졌는지, 어떤 대안이 검토됐는지, 무엇이 수정될 것인지가 설명되지 않을 때, 정책은 단일한 실패를 넘어 지속적인 불안 요소로 전환된다.
설명되지 않은 실패는 다음 정책까지 불신하게 만드는 기억으로 남는다.
이 불안은 행동을 바꾼다. 정책을 활용하는 전략보다, 정책을 피해 가는 전략이 확산된다.
제도를 정면으로 따르기보다 우회하거나 최소한만 접촉하려는 선택이 합리적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정책은 참여의 대상이 아니라, 관리해야 할 변수로 바뀐다.
이 지점에서 국가는 사라지지 않는다. 법과 제도, 행정 조직은 여전히 작동한다. 그러나 통치력은 약화된다. 통치력의 핵심은 명령의 강도가 아니라 예측 가능성에 있기 때문이다.
예측이 불가능한 통치는 존재할 수는 있어도, 신뢰를 축적하지는 못한다.
정책이 위험 변수로 인식되는 사회에서는 설명의 언어도 변한다.
정책 당국은 설득보다 방어에 집중하고, 책임 설명보다 상황 해명에 머문다. “불가피했다”, “외부 요인이 컸다”는 말이 반복될수록, 정책은 공동의 선택이 아니라 일방적 통보로 받아들여진다.
이 구조는 확증편향 사회와 결합하며 더욱 강화된다.
정책의 성공은 우연으로 해석되고, 실패는 구조적 무능의 증거로 축적된다. 이미 형성된 인식 구조 속에서 정책은 어떤 결과를 내더라도 신뢰를 회복하기 어려운 위치에 놓인다.
정책이 위험 변수가 되면 사회는 점점 방어적으로 변한다.
장기 계획은 줄어들고, 단기 대응이 늘어난다. 불확실성을 줄이기 위해 만들어진 정책이 오히려 불확실성을 확대하는 역설이 발생한다. 정책의 존재가 안정의 근거가 되지 못하는 사회다.
중요한 점은, 이 모든 과정이 혼란 속에서 벌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사회는 겉보기에는 비교적 안정적으로 작동한다. 그러나 그 안정은 정책에 대한 기대를 낮춘 결과일 수 있다. 기대하지 않으면 실망도 줄어들기 때문이다. 불신은 이렇게 조용히 관리된다.
정책은 그렇게 기능을 바꾼다.
안정 장치에서 위험 변수로, 보호 수단에서 회피 대상으로. 이는 정치의 실패라기보다, 설명과 책임이 누적되지 않은 구조의 결과다.
정책이 위험 변수로 인식되는 사회에서는 국가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통치력이 약화된다. 예측 가능성을 잃은 정책은 보호 장치가 아니라 계산해야 할 리스크가 된다.
다음 편(④ 불신 사회의 다섯 가지 징후)에서는 이러한 불신과 확증편향, 정책 회피가 축적된 사회에서 나타나는 다섯 가지 구조적 징후를 살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