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차>
Ⅰ부. 불신의 구조를 해부하다 (1~5편)
① 불신은 감정 아닌 학습
② 확증편향 사회의 등장
③ 정책이 안정 장치 아닌 위험 변수
④ 불신 사회의 다섯 가지 징후
⑤ 해법은 신뢰 회복 아닌 불신 관리
불신은 흔히 감정의 문제로 설명된다. 분노, 냉소, 정치적 성향 같은 단어들이 호출된다. 그러나 이 설명만으로는 오늘날 불신이 왜 이렇게 광범위하고, 왜 이렇게 오래 지속되는지를 설명하기 어렵다.
감정은 상황에 따라 변하지만, 불신은 시간이 지날수록 축적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어느 날 갑자기 정부를 믿지 않게 되지 않는다. 한두 번의 정책 실패로 사회 전체가 불신에 빠지지도 않는다.
불신은 반복된 경험 속에서 학습된다.
설명되지 않은 결정, 책임이 남지 않는 실패, 수정되지 않은 정책이 누적될 때, 불신은 감정이 아니라 합리적인 선택지로 자리 잡는다.
문제는 정책의 성공과 실패 그 자체가 아니다.
정책은 언제든 실패할 수 있다. 핵심은 실패 이후다.
왜 그런 판단이 내려졌는지, 어떤 다른 선택지가 존재했는지, 그 결과에 대해 누가 책임을 지는지에 대한 설명이 남지 않을 때, 사회는 실패보다 설명의 부재를 더 오래 기억한다.
이 기억이 쌓이면 사람들의 행동은 바뀐다.
정책의 의도를 묻기보다 결과를 먼저 의심하고, 약속을 신뢰하기보다 리스크를 계산한다. 이 지점에서 불신은 감정적 반응이 아니라, 학습된 생존 전략이 된다.
‘정책 피로 사회’라는 표현이 자주 쓰이지만, 이는 정확하지 않다.
사람들은 정책 자체에 피로해진 것이 아니다. 정책이 반복해서 설명되지 않은 채 등장하고, 별다른 책임 정리 없이 사라지는 경험에 피로해진 것이다.
무엇이 바뀌었는지가 아니라, 왜 바뀌었는지를 알 수 없을 때 정책은 안정 장치가 아니라 위험 요소로 인식된다.
이때 불신은 비합리적인 태도가 아니다. 오히려 이전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합리적이다.
설명되지 않는 변화는 위험하고, 책임이 남지 않는 결정은 반복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불신은 감정의 폭주가 아니라 경험에 근거한 예측이다.
문제는 이 학습이 개인 차원에서 멈추지 않는다는 데 있다.
불신은 점차 사회적 언어가 된다. “믿을 수 없다”는 말은 분노의 표출이 아니라, 일종의 경고처럼 사용된다. 이 경고가 공유될수록 의심은 예외가 아니라 기본값이 된다.
의심이 전제가 된 사회에서는 설명의 방식도 달라진다.
설득은 줄어들고 방어적 해명이 늘어난다. 책임을 지는 말보다 상황을 나열하는 말이 많아진다. 그 결과 사회는 점점 판단의 근거를 요구하지 않는 구조로 이동한다.
불신은 이렇게 만들어진다.
누군가의 악의나 선동 때문이 아니다. 반복된 경험이 사회 전체를 같은 방향으로 학습시킨 결과다.
신뢰가 사라졌다고 말하기 전에, 무엇이 사람들로 하여금 믿지 않는 편이 더 안전하다고 느끼게 만들었는지를 먼저 돌아봐야 한다.
불신 사회의 출발점은 분노가 아니다. 설명되지 않은 선택의 누적이다.
불신은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경험이 남긴 학습의 결과다. 이 학습이 반복될수록 사회는 믿음이 아니라 의심을 기준으로 작동하게 된다.
다음 편 ②확증편향 사회의 등장에서는 불신이 개인의 인식을 넘어 사회 전반의 인식 구조로 굳어지는 과정, 즉 확증편향이 사회 구조로 고착되는 메커니즘을 살펴본다.
김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