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의정 사상 최초로 양원을 구성한 제2공화국 첫 번째 국회의원선거가 1960년 7월29일 직접선거로 실시됐다. [사진=서울기록원]
1960년은 대한민국 정치사에서 격렬한 전환의 해였다. 3월15일 자유당 정권의 부정선거가 폭로되면서 전국적인 저항이 일어났고, 그 결과 4월19일 학생과 시민의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다.
이 사건은 결국 이승만 정권의 붕괴로 이어졌다. 대통령 중심 체제는 무너졌고, 정치권은 새로운 제도를 만들기 시작했다.
같은 해 6월 국회는 헌법을 개정하여 대통령 권한을 크게 줄이고 의원내각제를 채택했다. 이후 제2공화국 체제를 구성할 국회를 선출하기 위해 1960년 7월29일 제5대 국회의원 총선거가 실시됐다.
자유당 이후 국민은 어떤 정치를 선택할 것인가
이 선거는 단순한 정기 선거가 아니었다. 4·19 이후 처음 치러지는 전국 규모의 정치 시험이었다. 유권자들은 자유당 독재 이후 어떤 정치세력을 선택할 것인지 결정해야 했다. 선거는 민의원과 참의원을 동시에 뽑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정치 공간이 갑자기 넓어졌기 때문에 다양한 정당과 정치세력이 등장했다. 민주당, 자유당 잔존 세력, 무소속 정치인들뿐 아니라 이른바 혁신계 정당들도 공개적으로 선거에 참여했다.
혁신계 정치세력은 1950년대부터 존재했지만 전쟁 이후 반공 체제 속에서 정치 활동이 크게 제한되어 있었다. 그러나 4·19 이후 정치 환경이 바뀌자 이들은 다시 공개 정치 영역으로 나왔다.
대표적인 조직이 사회대중당, 한국사회당, 혁신동지총연맹 등이었다. 사회대중당에는 서상일, 윤길중, 김성숙, 정화암 같은 인물들이 참여했고, 한국사회당은 전진한 계열이 중심이 되었다. 이들은 민주당보다 더 급진적인 사회개혁 노선을 주장하며 정치세력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선거 결과는 냉정했다.
1960년 제5대 총선 민의원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총 233석 가운데 민주당이 175석을 차지하며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무소속은 49석, 자유당은 2석을 얻었다.
혁신계 정당의 성적은 훨씬 미미했다. 사회대중당은 4석, 한국사회당은 1석, 통일당은 1석에 그쳤다. 혁신계 전체를 합쳐도 6석 수준이었다.
득표율 역시 비슷한 모습을 보였다. 사회대중당은 약 6%, 한국사회당은 1%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전국 정치 지형에서 혁신계는 분명한 주변 세력이었다. 4·19혁명으로 정치 환경이 크게 흔들렸음에도 불구하고 유권자 다수는 급진 정치세력을 선택하지 않았다.
급진 정치세력, 선거에서 패하다
이 결과는 여러 가지 이유로 설명된다.
첫째는 한국전쟁의 기억이었다. 선거는 정전협정이 체결된 지 겨우 7년이 지난 시점에 치러졌다. 전쟁 경험은 사회 전체에 깊게 남아 있었다.
공산주의 체제에 대한 강한 경계심이 존재했고, 급진적인 정치 구호는 많은 유권자에게 불안 요소로 받아들여졌다. 정치적 안정과 국가 재건을 우선해야 한다는 인식이 사회 전반에 널리 퍼져 있었다.
둘째는 혁신계 내부의 분열이었다. 혁신세력은 선거 이전부터 통합 문제를 둘러싸고 갈등을 겪었다. 선거연합을 구성하려는 움직임도 있었지만 각 정당은 독자 후보를 내는 방식을 택했다.
사회대중당, 한국사회당, 혁신동지총연맹은 서로 경쟁하는 관계가 되었다. 일부 지역에서는 같은 혁신계 인물끼리 표를 나누는 상황까지 나타났다. 정치적 메시지도 통일되지 않았다. 이런 조건에서 전국적 정치세력으로 성장하기는 어려웠다.
셋째는 민주당의 정치적 흡수력이었다. 민주당은 4·19 혁명의 정치적 수혜자였다. 자유당 독재에 맞섰던 세력이라는 이미지가 강했고, 많은 유권자는 민주당을 통해 정권 교체와 정치 개혁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 결과 급진 정치세력 대신 민주당이 대규모 지지를 얻었다. 이후 민주당 소속의 윤보선이 대통령에 선출되고 장면이 국무총리가 되면서 제2공화국 정부가 출범했다.
이 시점에서 혁신계 정치세력은 중요한 선택 앞에 놓였다. 선거 결과를 분석하고 전략을 수정할 것인가,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 해석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정상적인 민주 정치라면 선거 패배는 정책과 조직을 점검하는 계기가 된다. 유권자가 왜 다른 정당을 선택했는지 분석하고 정치 전략을 바꾸는 과정이 이어진다.
그러나 혁신계 내부에서는 다른 해석이 등장했다. 선거 결과 자체를 현실 정치의 왜곡된 구조 속에서 이해하려는 시도였다.
한국 사회가 반공 체제 속에 놓여 있기 때문에 진짜 민의가 제대로 드러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자본과 권력이 선거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급진적 정치세력이 성장하기 어렵다는 논리도 제기되었다.
이러한 인식은 이후 혁신계 정치 전략에 영향을 주었다.
1961년 초 혁신계 내부에서는 대동통합 운동이 추진됐다. 여러 혁신 정당과 정치 그룹을 하나의 정치 조직으로 묶으려는 시도였다. 그 결과 1961년 1월 통일사회당 결성 움직임이 시작됐다. 사회대중당, 한국사회당, 혁신동지총연맹, 사회혁신당 등 여러 세력이 참여했다. 이 정당은 민족적 주체성과 민주적 사회주의를 결합한 노선을 내세웠다.
이 시기 혁신계의 또 다른 특징은 언론 활동이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민족일보였다. 민족일보는 1961년 2월13일 창간되었고 발행인은 조용수였다. 이 신문은 혁신계 정치노선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통일 문제와 중립화 외교 등을 주장했다. 학생운동과 지식인 사회에서도 일정한 영향력을 확보했다.
그러나 이런 정치적 움직임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한국 사회는 급진파를 원하지 않는다
1961년 5월16일 군 내부의 정군파 세력이 군사혁명을 일으켰다. 박정희와 김종필 등 장교들이 중심이 된 이 사건은 한국 정치 질서를 완전히 뒤바꾸었다.
5·16혁명 당시 박정희(가운데) 소장과 그를 경호하는 박종규(왼쪽) 소령과 차지철(오른쪽) 대위. [사진=서울기록원]
군정은 곧 국가재건최고회의를 설치했고 정치 활동을 강하게 통제했다. 같은 해 5월22일 포고령 제6호가 발표되면서 모든 정당과 정치 단체가 해산되었다. 통일사회당 역시 이 조치로 활동을 중단하게 되었다.
군정은 이후 혁신계 정치세력과 관련된 인물들을 대규모로 조사하고 체포했다. 이 과정에서 여러 사건이 발생했고 일부는 훗날 재심에서 판단이 뒤집히기도 했다. 특히 민족일보 사건은 이후 과거사 재평가 과정에서 다시 논의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사적으로 보면 중요한 사실 하나는 남는다. 1960년 총선에서 혁신계 정치세력은 이미 대중적 한계를 드러냈다는 점이다.
선거는 국민 다수의 정치적 판단을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장치다. 표의 숫자는 냉정하다. 어떤 정치세력이 사회에서 얼마나 지지를 받고 있는지 분명하게 드러낸다.
1960년 총선 결과는 한국 사회가 급진 정치세력을 중심으로 재편되기를 원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유권자 다수는 민주당 중심의 제2공화국 체제를 선택했다.
그러나 혁신계 일부에서는 이 패배를 현실 정치의 문제로 해석하기보다 정치 구조 자체의 문제로 설명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이러한 태도는 이후 한국 정치에서도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패턴 가운데 하나가 된다. 선거에서 승리하면 그것은 민의의 표현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선거에서 패배하면 정치 구조가 왜곡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등장한다. 정치세력이 패배를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그 이후의 정치 전략을 크게 바꾼다.
1960년 총선 패배와 그 이후 나타난 혁신계의 대응은 한국 정치사의 한 단면을 보여 준다. 민주주의는 선거 결과를 받아들이는 규칙 위에서 작동한다. 패배를 인정하고 다시 정치 전략을 세우는 과정이 있어야 정치 체계가 안정적으로 움직인다.
1960년 총선은 혁신계 정치세력에게 하나의 시험이었다. 그러나 그 시험 앞에서 일부 세력은 현실을 냉정하게 분석하기보다 선거 결과 자체의 의미를 다시 해석하는 길을 택했다. 이 선택은 이후 한국 정치 문화 속에서 여러 형태로 반복되는 사고방식의 출발점 가운데 하나로 남게 됐다.

◆ 松山(송산)
시인이자 역사·철학 연구자. 전 이승만학당 이사. 현 한국근현대사연구회 연구고문이자 철학 포럼 리케이온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시집 네 권을 출간했고, ‘후크고지의 영웅들’을 공동 번역했으며 역사심리학 해설서 ‘신화가 된 조선’(2026)을 펴냈다. 현재 자유주의 문화운동의 연구와 실천을 활발하게 이어가고 있다. 松山은 필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