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독재 막는다”… 野 4당 對이재명 연대 투쟁 초석 다져
권력 만능주의에 함몰된 이재명 정권의 패악질이 날로 격화한다는 지적이 잇따르는 가운데 정통보수를 표방해 온 자유우파 4당이 이재명 독재정권 퇴진과 공직선거법 재판 속개를 위한 반(反) 이재명 연대 전선 확대에 나섰다. 이에 따라 애국 시민 공동의 과업으로 꼽는 이재명 타도에 ‘분수령’이 될 것이라는 점에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자유와혁신(대표 황교안)과 자유통일당(전광훈 상임고문)·자유민주당(고영주 변호사)·우리공화당(대표 조원진)의 대표 4인은 반 이재명정부와 반 더불어민주당 세력을 규합하기 위한 전략·전술의 일환으로 자유우파 4당 연대 카드를 제시하고 더는 선언적 구호에 그치지 않는 실제적인 총력 투쟁에 즉각 착수할 것을 결의했다.
194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초대 내각 구성원들. 앞줄 왼쪽부터 △국가기획위원회 위원장 정준택 △부수상 겸 산업상 김책(의문사) △부수상 홍명희 △수상 김일성 △부수상 겸 외상 박헌영(숙청 처형) △민족보위상 최용건 △문화선전상 허정숙. 2열 왼쪽부터 △보건상 이병남 △국가검열상 김원봉(숙청 처형) △교육상 백남운 △교통상 주영하(숙청) △상상(商相) 장시우(숙청 처형) △재정상 최창익(숙청 처형) △내상(內相) 박일우(숙청 처형). 3열 왼쪽부터 △농림상 박문규 △무임소상 이극로 △도시경영상 이용 △체신상 김정주(숙청) △사법상 이승엽(숙청 처형) △노동상 허성택(숙청 처형).
1958년 평양은 조용했다. 그러나 그 조용함은 질서의 결과가 아니었다. 반대 세력이 제거된 뒤 남은 정적이었다. 정전협정은 1953년 7월27일 체결됐다. 전쟁은 멈췄지만, 권력 재편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1953년 “박헌영은 미제 간첩 및 종파 분자”
당시 북한 권력 내부에는 네 계열이 병존했다.
첫째, 소련파. 대표 인물로는 박창옥, 허가이(허가이는 1953년 사망), 그리고 소련에서 교육을 받은 간부들이 있었다.
둘째, 연안파. 중국 옌안에서 활동했던 최창익, 김두봉, 윤공흠 등이 포함된다.
셋째, 국내파. 남로당 계열의 박헌영, 이승엽 등이 중심이었다.
넷째, 만주 항일 유격대 출신, 이른바 갑산파와 항일 빨치산 그룹. 김일성, 최현, 김책(1951년 사망) 등이 이 계열에 속한다.
전쟁 직후까지 김일성은 절대 권력을 장악한 상태가 아니었다. 박헌영은 부총리 겸 외무상으로 활동했고, 김두봉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었다. 권력은 다극적 구조였다.
첫 번째 대규모 숙청은 1953년 8월5·6일 열린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6차 전원회의에서 시작되었다. 박헌영은 “미제 간첩 및 종파 분자”로 규정돼 실각했다.
1955년 12월15일 북한 최고재판소는 박헌영과 이승엽 등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이 판결은 공개 재판 형식이었으나 실질적으로는 정치적 숙청이었다. 국내파는 이 시점에서 사실상 해체되었다.
결정적 분기점은 1956년이다. 1956년 2월 25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소련 공산당 제20차 당대회에서 니키타 흐루시초프는 비밀연설을 통해 스탈린의 개인 숭배와 대숙청을 비판했다.
이 연설은 동구권 전체에 충격을 주었다. 같은 해 6월 폴란드 포즈난 시위, 10월 헝가리 혁명이 발생했고, 11월 소련군이 부다페스트에 재진입했다. 사회주의권은 격동 상태였다.
이러한 국제적 분위기 속에서 1956년 8월30일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가 열렸다. 훗날 ‘8월 종파사건’이라 불린다.
박창옥은 김일성의 경제정책을 비판했다. 중공업 우선 정책으로 소비재 부족과 생활 곤란이 심화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최창익은 개인우상화 문제를 제기하며 집단지도체제 도입을 요구했다. 윤공흠, 서휘 등도 유사한 문제 제기를 했다.
핵심 쟁점은 두 가지였다. 첫째, 경제 노선 수정. 1954~1956년 3개년 계획 추진 과정에서 중공업 집중 투자로 인한 생활물자 부족 문제. 둘째, 지도체제 구조. 정치국과 중앙위원회의 집단적 의사결정 복원 요구.
이는 단순한 정책 비판이 아니었다. 최고지도자의 권한을 제도적으로 제한하자는 요구였다. 김일성은 이를 “종파적 음모”로 규정했다. ‘종파’라는 표현은 당의 통일을 해치는 반당 세력이라는 의미였다. 회의장에서 김일성을 지지하는 발언이 이어졌고, 비판 인사들은 고립되었다.
그러나 사건은 곧 국제 문제로 비화되었다. 1956년 9월 소련 정치국원 아나스타스 미코얀과 중국 국방부장 펑더화이가 평양을 방문했다.
소련과 중국은 과도한 숙청이 동구권 불안정과 유사한 사태를 초래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일시적으로 일부 인사가 복권됐다. 그러나 이는 전술적 후퇴였다.
1957년 박창옥과 최창익 축출
1957년부터 조직지도부(당 조직지도부는 이후 김일성 권력의 핵심 도구가 된다)를 통해 박창옥과 최창익 등은 지방으로 전출되거나 직위가 박탈됐다. 공개 처형 대신 점진적 제거가 진행됐다.
1958년 8월 전원회의에서 이들은 최종적으로 축출됐다. 이후 박창옥은 1960년대 초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최창익은 정치범수용소로 보내진 뒤 행적이 사라졌다. 김두봉 역시 1958년 이후 숙청되었고, 연안파는 사실상 소멸했다.
1956년 8월30일 북한 전원회의에서 김일성이 발언하고 있다.
1958년 8월13일 북한은 농업협동화 100% 달성을 공식 발표했다. 1953년 5% 수준이던 협동화율은 1956년 80%를 넘었고, 1958년 말 전면 집단화가 완료됐다고 주장했다.
이는 토지의 완전한 집단 소유 체제 확립을 의미한다. 1946년 토지개혁으로 지주층을 제거했고, 1956년까지 상공업 국유화가 완료됐다. 1958년은 정치 권력과 생산수단이 동시에 중앙에 집중된 해였다.
1958년 10월 중국인민지원군은 철수했다. 1950년 10월 참전 이후 약 8년 만이었다. 중국군 철수는 북한 내부 권력 구조에서 외부 변수 제거를 의미했다.
이후 1967년 ‘유일사상체계 확립의 10대 원칙’이 채택됐고, 1972년 12월27일 제정된 사회주의헌법은 국가주석제를 도입했다. 김일성은 국가주석으로 추대됐다.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국내파 제거(1953~1955): 1953년 8월 박헌영 축출을 시작으로 남로당 계열이 숙청됐다. 1955년 12월 사형 선고와 처형으로 국내파는 사실상 해체됐다.
△소련파·연안파 정리(1956~1958): 1956년 8월 종파사건 이후 박창옥, 최창익 등 비판 세력이 단계적으로 제거됐다. 1958년 전원회의를 거치며 집단지도 가능성은 사라졌다.
△경제 전면 집단화(1958): 1958년 8월 농업협동화 100% 달성이 선언되었다. 토지와 생산수단이 전면 집단화되며 경제 통제가 완성됐다.
△중국군 철수(1958년 10월): 1950년 참전한 중국인민지원군이 철수했다. 외부 견제 요인이 사라지며 김일성 권력은 군사적으로도 독자적 기반을 확보했다. 이 네 단계가 결합되며 1인 체제가 구조화되었다.
1958년 평양의 정적은 그래서 단순한 안정이 아니었다. 파벌 정치의 종식이 아니라 파벌 제거의 결과였다. 그 이후 북한 정치에서 집단지도 가능성은 사라졌다. 권력은 한 축으로 수렴되었고, 그 구조는 수십 년간 유지되었다.
여기서 질문이 생긴다. 그러면 남한은 이를 어떻게 보았는가?
종북 좌파, 대숙청을 사회주의 건설의 한 단계로 설명
1950년대 후반 대한민국은 강력한 반공 체제 아래 있었다. 그러나 대학가와 일부 지식인 집단에서는 북한을 ‘민족 자주 국가’로 해석하는 인식이 존재했다.
1953년 동독 봉기, 1956년 헝가리 진압은 비판의 대상이 되었지만, 평양 내부 숙청은 구조적 분석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정보가 없어서가 아니었다. 박헌영 재판은 공개 형식이었고, 8월 종파사건은 소련과 중국 지도부가 개입할 정도로 국제적 사안이었다. 권력 집중의 신호는 분명했다.
그럼에도 일부 종북 좌파 담론은 이를 ‘반종파 투쟁’이나 ‘혁명 노선 정리’로 해석했다. 집단지도 요구는 분열 행위로, 지도자 권한 강화는 체제 방어로 번역되었다.
북한 내부에서 집단지도체제가 사라지고 개인 중심 통치가 굳어졌다는 사실은 정치 체제의 성격을 규정하는 문제다. 그러나 남한 종북 좌파 담론에서는 그것이 독재의 심화가 아니라 사회주의 건설의 한 단계로 설명됐다. 권력 독점은 반제 투쟁이라는 언어 속에 흡수됐다. 비판은 체제 부정으로 규정됐고, 침묵은 연대의 태도로 포장됐다.
구체적 사례를 보면 이 태도는 더 선명해진다. 1956년 헝가리 사태 당시 일부 좌파 지식인들은 소련군의 개입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그러나 같은 해 8월 평양에서 집단지도 요구가 제거되고 비판 인사들이 축출되었을 때, 동일한 기준은 적용되지 않았다.
학술지와 소규모 연구 모임에서 동구권 개혁 논의는 소개되었지만, 북한 권력 구조에 대한 분석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사회주의 내부의 노선 투쟁’이라는 표현이 반복되었을 뿐, 권력 집중이라는 개념은 전면에 등장하지 않았다.
박헌영 처형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단순한 개인이 아니라 국내 공산주의 운동의 핵심 인물이었다. 그가 공개 재판을 거쳐 처형되었음에도, 이를 북한 권력 구조의 경직화 신호로 해석하는 논의는 제한적이었다.
오히려 일부에서는 이를 “전쟁 책임 정리”로 설명하거나 언급 자체를 회피했다. 정치적 제거가 체제 안정의 과정으로 재해석된 것이다.
1958년 협동화 완료 선언에 대해서도 비슷한 양상이 나타났다. 토지와 생산수단의 전면 집단화는 경제 권한의 국가 집중을 의미했지만, 일부 종북 성향 담론에서는 이를 “식민 잔재 청산”이나 “계급 구조 해체”라는 표현으로 긍정적으로 서술했다. 정치적 숙청과 경제적 통제가 동시에 진행되었다는 점은 논의의 중심이 되지 못했다.
이러한 태도는 단순한 해석 차이를 넘어선다. 동구권의 권위주의는 비판하면서, 북한의 권위주의는 ‘민족적 특수성’으로 완화하는 이중 기준이 작동했다.
권력 집중을 독재로 명명하지 않는 선택은 정치적 판단이다. 침묵은 중립이 아니다. 분석을 유보하는 행위는 현실을 그대로 용납하는 행위와 다르지 않다.

◆ 松山
시인이자 역사·철학 연구자. 전 이승만학당 이사. 현 한국근현대사연구회 연구고문이자 철학 포럼 리케이온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시집 네 권을 출간했고, ‘후크고지의 영웅들’을 공동 번역했으며 역사심리학 해설서 ‘신화가 된 조선’(2026)을 펴냈다. 현재 자유주의 문화운동의 연구와 실천을 활발하게 이어가고 있다. 松山은 필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