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부정선거를 외치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으며, 결국 선거승리로 권력을 탈환해야만 제도를 고칠 수 있다는 현실을 일찌감치 깨닫고 있었다. [사진-=백악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부정선거 투쟁에서 가장 주목할 대목은, 그가 단순한 불복이나 분노의 표출에 머물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2020년 대선 불복의 법적 노력은 모두 실패했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2021년 1월 황망히 백악관을 떠난 바로 다음달 보수 진영 최대 정치행사인 보수정치행동회의(CPAC) 연설에서 2022년 중간선거를 통해 공화당이 상·하원을 되찾도록 돕겠다고 했으며 2024년 재도전 가능성도 내비쳤다.
수사와 입법으로 증명하는 ‘트럼프식 정면돌파’
출발부터 그의 시선은 ‘억울함의 호소’가 아니라 ‘권력의 탈환’에 가 있었다. 부정선거를 외치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으며, 결국 선거승리로 권력을 탈환해야만 제도를 고칠 수 있다는 현실을 일찌감치 절감했던 것이다.
트럼프의 재야 4년이 신당 창당 대신 기존 공화당을 갈아엎는 말그대로 '밭갈이’ 시간에 가까웠다는 것도 눈길을 끈다.
주요 외신 보도에 따르면 그가 자신을 ‘굴러온 돌’ 취급하던 공화당 내 의원·당직자·활동가들을 겨냥해 당의 대대적 물갈이를 공언했으며, 2024년 전당대회 무렵엔 사실상 ‘공화당=트럼프당’이 돼 있었다. 앞서 경선 규칙과 일정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했고, 2024년 3월엔 측근과 며느리 라라를 내세워 공화당 전국위원회(RNC) 지도부를 장악했다.
이는 우발적 인기의 산물이 아니라, 재집권을 목표로 당 기구·자금·규칙·인사권을 차례로 다시 손에 넣는 조직전이었다.
재야 4년간 트럼프는 자신을 비웃거나 거리 두던 공화당 주류를 ‘라이노’로 몰아세우며, 2020년 대선 결과 의혹에 미온적이거나 공개적 반기를 든 세력을 약화시켰다.
그 결과 공화당 내부의 질문도 달라져 갔다. 부정선거를 음모론 취급하던 당내 분위기가 ‘왜 미국 선거는 이렇게 허술한가’, ‘시민권 내지 사진 신분증 확인이 선거의 기본 아닌가’ 쪽으로 바뀐 것이다.
다시 말해 트럼프는 부정선거를 ‘완벽히 입증된 사건’화 하기보다, 선거보안과 유권자 자격 문제를 공화당의 조직 원리이자 선거동원 구호로 바꾸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 성공엔 글로벌리즘과 중국의 부상과 반비례해 몰락한 중하층 백인·블루칼라·러스트벨트 유권자의 정서를 붙잡았다는 게 주효했다.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는 지난 30여 년의 세계 공급망과 자본 이동 구조를 되돌려 미국 제조업과 일자리를 되찾겠다는 의지로 읽혔다.
이 반(反)글로벌리즘 정치는 국경·이민·우편투표·유권자 등록·선거관리까지 하나의 흐름으로 묶였다. 트럼프 지지층에게 ‘느슨한 국경’ ‘느슨한 선거관리’는 동일한 병증의 두 얼굴이었고, 그 결정적 발작 지점이 2020년 대선 결과였던 것이다.
팬데믹 아래 미국은 우편투표와 사전투표를 대폭 확대했다. 일부 주는 선거일 이후 며칠, 길게는 수주 뒤 도착한 우편투표까지 유효 처리했다. 2020년 선거일 밤 개표 지연과 대도시 개표소 혼선까지 겹치면서, 트럼프는 이를 ‘증거 완결’이 아니라 ‘상식 차원의 불안’으로 정치화했다.
트럼프 뚝심의 저력이었다. 법정의 언어로는 부족했던 의혹을, 대중정치의 언어, 곧 ‘이 제도는 고쳐야 한다’는 요구로 바꾸어낸 것이다.
사법적 실패를 정치적 승리로 바꾼 역설
외세개입 정황도 이 프레임을 강화했다. 미 국가정보국(DNI) 보고서는 2020년 대선 과정에서 미 선거와 정치적 정당성을 흔들기 위한 외부의 영향력 공작이 있었다고 평가했다.
직접적인 개표 조작 입증을 공표하진 않았지만, 외국 행위자들이 미국 선거를 노렸다는 팩트 자체는 확인된 셈이다. 중국 본토·홍콩발 위조 신분증 대량 압수 사건도 같은 맥락에서 작용했다.
그것이 곧장 불법투표로 이어졌다고 단정할 수는 없으나, 방만한 신원확인 체계와 우편투표가 언제든 악용될 수 있다는 시민적 불안을 자극하기엔 충분했다.
재집권한 트럼프는 그간의 불신과 확신을 실제 제도개편으로 연결했다. 세이브 아메리카(SAVE America) 법안은 신규 유권자 등록 시 시민권 증빙과 사진 신분증을 요구하는 내용으로 추진 중이다.
민주당을 ‘무방비 국경과 허술한 투표관리의 당’으로 몰아세우는 중간선거용 무기로도 활용하고 있다. 1월 조지아주 풀턴카운티 2020년 선거 관련 기록 확보를 위한 연방수사국(FBI) 압수수색도 그 연장선에 있다.
이 수사가 최종적으로 결정적 부정을 입증할지는 미지수다. 하지만 음모론 취급받던 사안을 재차 연방수사와 기록 확보의 문제로 끌어올렸다는 점 자체가 중요하다. 권력을 되찾아야만 수사·행정·입법의 언어로 문제를 다시 제기할 수 있다. 이것이 트럼프가 남긴 교훈의 핵심이다.
부정선거의 주장과 증명 노력은 필수지만 그것만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의혹투성이 제도를 고치고 선거관리 규칙을 손보며 국가기관을 움직이려면 결국 선거에서 이겨 권력을 되찾아야 한다. 트럼프는 재야 4년 동안 그 점에 올인했다.
신당을 만들어 외치는 대신, 공화당이라는 기존 거대 기구를 접수하고 재집권에 성공한 뒤 선거보안 논쟁을 법치와 제도개편의 무대로 옮겼다. 트럼프의 부정선거 정치학은 ‘사법적 완승의 역사’라기보다, ‘권력 복귀를 통해 의혹을 제도개혁의 동력으로 바꾼 정치의 역사’라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하다.

임명신 前 스카이데일리 국제 부국장
서울대·도쿄대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