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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松山칼럼ㅣ종북 좌파 80년사] ㉒1968~1971 통혁당 재판과 판결
  • 松山 작가
  • 등록 2026-05-14 21: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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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임 대신 ‘정치재판’ 프레임 고정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1970년 사형을 선고받은 김종태(왼쪽)와 이문규.

1968년부터 1971년까지 이어진 통일혁명당 재판은 한국 현대 정치사에서 매우 의미있는 자리를 차지한다. 법원 기록만 보면 반국가 조직 사건이다. 그런데 훗날 운동권의 기억 속에서는 민주화 탄압 사건으로 바뀌어 있다. 같은 사건인데 이름이 달라졌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한국 좌파의 오래된 생존 방식 하나가 명확하게 드러난다. 조직의 책임은 줄이고, 재판의 성격을 바꾸고, 판결의 뜻을 뒤집는 방식이다. 통혁당 재판은 이 테크닉이 처음 제대로 작동한 첫 사례였다.

 

통일혁명당, 줄여서 통혁당은 1960년대 중반 만들어진 비밀 지하조직이었다. 중앙정보부 발표에 따르면 통혁당은 1964년 무렵부터 서울, 대구, 전주, 광주 등지에서 조직원을 모았다. 총책으로 지목된 사람은 김종태였다. 

 

김종태는 전남 강진 출신으로, 당시 조직의 정치 노선을 정리하고 하부망을 묶는 핵심 책임자로 수사기록에 올라 있다. 김종태와 함께 통혁당 핵심으로 기소된 인물은 김질락, 이문규, 이관학, 신영복, 박성준 등이었다. 훗날 학생운동권과 재야권이 반복해서 소환한 이름들이다.

 

1968년 8월 24일 중앙정보부는 통혁당 사건 적발을 공식 발표했다. 발표 내용은 검거 158명, 입건 98명, 기소 73명이었다. 당시 기준으로 보면 꽤 큰 규모였다. 중앙정보부는 이 조직이 북한 노동당 통일전선부 노선에 맞춰 남한 내부에서 지하 혁명당을 만들려 했다고 발표했다. 

 

학생층과 노동 현장을 파고들고, 반정부 선전물을 만들고, 사회 혼란을 키우며 체제 전복 기반을 쌓으려 했다는 것이 수사기관의 설명이었다. 당시 정부는 이 사건을 “북한 연계 지하당 사건”으로 규정했다.

 

이 사건이 터진 1968년은 평범한 해가 아니었다. 1월21일 북한 124군 부대 소속 무장공비 31명이 청와대 기습을 시도했다. 불과 이틀 뒤인 1월23일에는 미 해군 정보함 푸에블로호가 북한에 나포됐다. 10월에는 울진·삼척에 무장공비 120명이 침투했다. 

 

1년 사이 북한 무장공작이 세 차례나 크게 터졌다. 당시 한국 사회가 북한 관련 사건에 예민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통혁당 수사가 과잉이었다는 비판은 물론 가능하다. 다만 이 사건이 왜 그렇게 크게 다뤄졌는지는 당시 안보 환경을 빼고 설명할 수 없다.

 

검찰은 김종태 등 핵심 피고인에게 국가보안법, 반공법, 내란예비음모 혐의를 적용했다. 검찰의 논리는 통혁당은 친목 모임이 아니라 정치조직이며, 사상 토론 모임이 아니라 행동 조직이라는 것이었다. 

 

검찰은 압수 문건, 조직도, 진술 조서를 근거로 “이들은 생각만 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움직였다”고 주장했다. 학생을 포섭하고, 반정부 문건을 만들고, 북한 혁명론을 조직 내부에 퍼뜨린 것은 표현이 아니라 실행이라는 논리였다.

 

피고인 측은 다른 주장을 했다. “우리는 간첩이 아니다”라는 말도 했지만, 더 앞세운 것은 “이 재판은 정치재판”이라는 구호였다. 여기서 통혁당 재판의 성격이 바뀌기 시작한다. 검찰은 조직을 주장했고, 피고인 측은 정권을 내세웠다. 

 

검찰은 문건을 내밀었고, 피고인 측은 고문과 강압수사를 말했다. 검찰은 조직 구조를 설명했고, 피고인 측은 박정희 정권의 독재를 꺼냈다. 법정의 초점이 피고인의 행위에서 정권의 성격으로 옮겨간 것이다.

 

이 변화는 매우 중요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복잡한 공소장보다 쉬운 구호를 더 빨리 기억하기 때문이다. “국가보안법 위반”은 길고 어렵다. “정치재판”은 짧고 강하다. “반국가 조직”은 설명이 필요하다. “독재 탄압”은 바로 이해된다. 통혁당 피고인들은 바로 이 언어를 잡았다. 법률에서는 불리했지만, 여론에서는 밀리지 않는 말을 먼저 만든 것이다.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통일혁명당 관계자 명단

1970년 1심 판결이 나왔다. 김종태 사형, 김질락 사형, 이문규 사형이 선고됐다. 1971년 대법원은 핵심 피고인들에 대한 유죄 판단을 유지했다. 그리고 1971년 7월10일, 김종태·김질락·이문규 3명에 대한 사형이 집행됐다. 정부는 이들을 “국가전복을 꾀한 반국가 조직 책임자”라고 발표했다. 이 숫자와 이름은 당시 신문에 분명히 찍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사람들 기억 속에 남은 것은 판결문이 아니었다. 남은 것은 다른 말이었다. 김종태는 사형수가 아니라 “독재정권에 희생된 인물”로 불리기 시작했다. 통혁당 관련 인물들 가운데 일부는 “민주인사” “양심수”라는 이름으로 다시 소개됐다. 법원이 붙인 죄목보다 운동권이 붙인 별명이 더 널리 퍼졌다.

 

여기서 한국 좌파는 중요한 기술 하나를 익혔다. 유죄 판결을 받아도 정치적으로는 이길 수 있다는 계산법이다. 법정에서 이기지 못해도 된다. 감옥에 가도 된다. 대신 사회에 남길 말을 먼저 장악하면 된다. △“간첩”을 “통일운동가”로 △“반국가 활동”을 “민주화 운동”으로 △“유죄 판결”을 “독재의 탄압 기록”으로 바꾸는 식이다. 사실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사실 위에 다른 이름을 덮어씌우는 방식이다.

 

이 기술은 감옥의 뜻도 바꿨다. 원래 감옥은 처벌받은 사람이 가는 곳이다. 그런데 통혁당 이후 운동권 세계에서 감옥은 정치 경력이 되기 시작했다. 

 

몇 년을 살았는가, 어느 사건으로 들어갔는가, 누구와 함께 수감됐는가가 경력이 됐다. 징역은 낙인이 아니라 이력이 됐다. 통혁당 관련자들이 출소 뒤 학생운동권과 재야권에서 “감옥 다녀온 선배”로 불린 이유가 여기에 있다.

 

1968년 검거 158명, 기소 73명, 사형 3명, 중형 다수라는 기록이 분명히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1970년대 후반 대학가 유인물과 재야권 글에서는 이 사건이 “북한 연계 지하조직 사건”보다 “민주인사 탄압 사건”으로 더 자주 불렸다. 기록은 그대로인데 설명만 바뀐 것이다. 사건의 내용이 아니라 사건을 읽는 말이 바뀐 셈이다.

 

이런 방식은 통혁당에서 끝나지 않았다. 1974년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 1979년 남민전 사건, 1981년 부림 사건에서도 거의 같은 문법이 반복됐다. 혐의보다 고문, 조직보다 탄압, 판결보다 감옥, 유죄보다 피해를 먼저 내세우는 방식이다. 통혁당 재판이 그 첫 교본이었다.

 

통혁당 재판의 핵심은 판결문 그 자체가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판결 뒤에 붙은 새로운 설명이다. 통혁당은 법원에서 유죄를 받았다. 그러나 운동권은 그 유죄를 패배로 두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을 경력으로 바꿨다. 감옥을 훈장으로 만들고, 판결문을 이력서로 바꾸고, 책임을 정치재판이라는 말로 덮는 법을 여기서 처음 제대로 익혔다. 1968년 서울 법정에서 시작된 이 방식은 훗날 한국 운동권 전체를 움직이는 오래된 기술이 됐다.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통일혁명당 조직도




◆ 松山(송산) 

 

시인이자 역사·철학 연구자. 전 이승만학당 이사. 현 한국근현대사연구회 연구고문이자 철학 포럼 리케이온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시집 네 권을 출간했고, ‘후크고지의 영웅들’을 공동 번역했으며 ‘신화가 된 조선’과 ‘다다미 위의 인문학’을 펴냈다. 현재 자유주의 문화운동의 연구와 실천을 활발하게 이어가고 있다. 松山은 필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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