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 ‘부정선거 저승사자’ 美 린델팀, 평택 황교안 캠프 찾아
일명 ‘부정선거의 저승사자’로 통하는 미국 린델(Lindell)팀이 경기 평택을 찾아 이 지역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한 황교안 자유와혁신 당대표(전 대통령 권한대행 및 국무총리)와의 상견례로 첫 공식 활동의 포문을 열었다. 28일 오후 인천공항을 통해 입국한 한미 공동 부정선거 조사단(US-Korea joint election fraud investigation team)의 미국 측 인사들은 이날 공항에서 소정의 약식 인터뷰를 진행한 뒤 곧바로 경기 평택으로 향했다.
1959년 7월24일, 미국무역박람회 개막을 하루 앞둔 소련 모스크바. 이날 리처드 닉슨(오른쪽) 미국 부통령과 니키타 흐루쇼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박람회장을 찾았다.
해방 직후 미국의 대외 전략은 급격히 바뀌었다. 1945년 패전 직후만 해도 미국은 독일과 일본을 다시는 군사, 산업 강국으로 만들지 않겠다는 방향이었다. 독일은 분할과 비군사화, 일본은 재벌 해체와 중공업 축소가 핵심이었다. 실제로 미군 점령 초기 일본에서는 중화학 공업 제한과 농업 중심 경제 전환까지 검토되었다.
그러나 불과 몇 년 사이 세계 정세가 뒤집힌다. 소련과의 냉전이 본격화된 것이다. 미국은 곧 독일과 일본을 “처벌 대상”이 아니라 “반공 전초기지”로 다시 보기 시작했다. 이 변화는 단연코 냉전 전략의 산물이었다.
냉전이 가져온 미국의 전략 변화
독일의 사례가 가장 상징적이다. 전후 미국은 처음에는 나치 청산을 강하게 밀어붙였다. 그러나 곧 소련 견제가 더 중요해졌다. 그 과정에서 등장한 인물이 라인하르트 겔런이다. 그는 나치 독일 국방군 정보조직에서 소련 담당 첩보망을 운영하던 장교였다. 전쟁 말기 그는 동유럽, 소련 관련 정보망 자료를 미국 측에 넘겼고, CIA 전신 조직과 협력 관계를 형성했다.
미국은 겔런 조직을 해체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를 활용했다. 1946년 미국 지원 아래 “겔런 조직(Organisation Gehlen)”이 운영되었고, 훗날 이것은 서독 연방정보부(BND)의 기반이 된다. 서독 정보기관 초기 인력 상당수 역시 과거 나치 체제 경험자들이었다는 연구가 있다.
미국 입장에서 중요한 것은 “과거의 순수성”보다 “소련을 막을 능력”이었다. 냉전은 도덕보다 전략을 우선하게 만들었다.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초기 미군정은 군국주의 청산과 재벌 해체를 추진했다. 그러나 1947년 이후 정책 방향이 급격히 바뀐다. 이른바 “역코스(reverse course)”다. 중국 공산당 세력이 급부상하고 소련 영향력이 동아시아에서 커지자, 미국은 일본 경제를 다시 살리기로 결정했다.
그 결과 전범 용의자였던 인물들까지 복귀한다. 대표 사례가 기시 노부스케다. 그는 전시 일본 내각의 핵심 관료였고 만주국 경제 운영에도 깊게 관여했다. 전후 A급 전범 용의자로 체포되었지만 기소되지 않았고, 냉전이 심화되면서 석방된다. 이후 그는 일본 총리 자리까지 오른다.
이것은 일본만의 특수 현상이 아니었다. 미국은 일본을 반공 산업기지로 재편하고 있었다. 한국전쟁은 이 흐름을 더욱 가속했다. 전쟁 기간 일본은 미군 군수 생산과 병참 기지 역할을 맡았다. 일본 경제는 한국전쟁 특수로 급속히 회복된다. 일본 학계와 한국 연구자들 다수는 이를 “한국전쟁 특수” 혹은 “기지국가화”로 설명한다.
국가 운영 위해 남북 모두 일제의 자산 활용
한국 역시 이 흐름과 무관하지 않았다. 미군정은 해방 직후 조선을 직접 통치할 준비가 거의 되어 있지 않았다. 조선총독부는 사라졌지만, 세금과 철도, 경찰, 행정을 돌릴 경험자도 동시에 부족했다.
서울대 행정대학원 연구에 따르면 미군정기 중앙 한국인 관료의 54.6%가 한일병합기 관료 경험자였다. 서울시 관료는 74.4%, 지방 관료도 40% 이상이 일제 행정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군수는 약 70%, 판·검사 역시 약 70%가 식민지 시기 경력자였다는 분석도 있다.
즉, 해방 직후 남한 행정은 “완전한 단절”이 아니라 상당한 연속성 위에서 움직였다. 이것은 친일 문제를 가볍게 보았기 때문만이 아니라, 국가 운영 자체가 붕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북한도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북한 역시 순수한 항일 빨치산만으로 체제를 운영하지 못했다. 초기 북한 정권은 일제 시기 기술자, 철도 인력, 행정 실무자 일부를 계속 활용했다. 특히 공장과 전력, 철도 분야는 숙련 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소련군 역시 현실적으로 이들을 배제할 수 없었다.
결국 남북 모두 식민지 시기의 인적 자산 일부를 흡수하며 국가를 만들었다. 차이는 활용 방식과 정치적 정당화에 있었다.
문제는 이후 한국 사회가 이 복잡한 현실을 자주 “절대적 선악 구도”로만 설명해 왔다는 점이다. 물론 친일 협력의 책임은 분명 존재한다. 실제로 식민 통치에 적극 가담하며 부와 권력을 얻은 세력도 있었다. 그러나 해방 직후 현실은 영화처럼 “악인을 모두 제거하고 새 국가를 세운다”는 식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냉전은 미국에게 과거 청산보다 반공 진영 구축을 더 중요하게 만들었다. 독일의 겔런 조직, 일본의 기시 노부스케 복귀, 남한의 한일병합기 관료 재활용은 모두 그 흐름 안에서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한국전쟁은 그 흐름을 완전히 굳혀버린 결정적 사건이었다.

◆ 松山(송산)
시인이자 역사·철학 연구자. 전 이승만학당 이사. 현 한국근현대사연구회 연구고문이자 철학 포럼 리케이온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시집 네 권을 출간했고, ‘후크고지의 영웅들’을 공동 번역했으며 인문서 ‘신화가 된 조선’ ‘다다미 위의 인문학’ ‘자유주의자의 그람시 읽기’를 펴냈다. 松山은 필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