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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가려진 민주주의 ② 가려진 표들
  • 김영 기자
  • 등록 2025-09-23 15:3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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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표기는 돌아가지만 투표지는 사라진다
  • 통계는 공개돼도 검증은 막혀 있다
  • 불신의 제도, 선거와 민주주의 신뢰의 균열
민주주의는 절차와 제도의 신뢰로 유지됩니다. 그러나 한국의 선거제도는 ‘공정’이라는 이름 아래 정작 국민이 직접 확인할 수 없는 장치들로 가려져 있습니다. 개표기와 전산망은 숫자를 신속히 내놓지만, 투표지 재검표와 같은 실질적 검증은 제약이 따릅니다. 이 글은 5·18 민주유공자 제도와 마찬가지로 ‘가려진 구조’가 사회적 불신을 키우는 또 다른 사례로 선거제도를 조명합니다. <편집자 주>

숫자의 속도보다 과정의 투명성이 중요하다. 개표기와 통계의 신속함 뒤에 가려진 검증의 한계가 불신을 낳는다. 한미일보 그래픽


숫자는 투명하지만 진실은 가려졌다


선거는 민주주의의 심장이다. 그러나 선거가 끝날 때마다 어김없이 불신과 의혹이 제기된다. 개표 방송은 실시간으로 숫자를 쏟아내지만, 정작 국민이 직접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투표지는 금고에 들어가고, 전산 기록은 전문가가 아니면 접근조차 어렵다. 숫자는 투명하게 공개되지만, 진실을 검증하는 길은 가려져 있다.


한국의 선거제도는 표면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빠르고 투명한 체계를 자랑한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실시간 개표 상황을 공개하고, 지역별 투표율과 득표율을 누구나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과정과 결과를 국민이 직접 검증하는 길은 막혀 있다. 투표함이 개표소로 이동하는 순간, 전산망에 입력되는 과정, 개표가 끝난 뒤 투표지가 어떻게 보관되는지는 국민이 확인할 수 없는 영역이다. 재검표가 허용되더라도 ‘표의 진위’와 ‘프로그램의 안전성’을 동시에 들여다볼 수 있는 장치는 없다. 겉으로 드러난 통계적 투명성과 실제 검증의 불가능성 사이의 간극이 바로 불신의 뿌리다.


2002년 지방선거부터 도입된 전자 개표기는 신속성을 획기적으로 높였다. 하지만 이 기계가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 내부 소프트웨어가 어떻게 숫자를 산출하는지는 불투명하다. 법적으로는 단순한 분류기에 불과하다고 하지만, 실제로 최종 집계에 미치는 영향은 적지 않다. 결국 국민은 “기계가 정확하다”는 전제를 받아들이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다. 검증할 수 없는 ‘블랙박스’를 신뢰하라는 요구는 제도적 신뢰를 구축하기보다 의혹을 낳는다. 이 같은 문제는 한국만의 현상이 아니다. 독일 연방헌법재판소가 2009년 “국민이 직접 검증할 수 없는 전자투표기는 위헌”이라고 판단했고, 미국 역시 2000년 플로리다 사태 이후 수기 검증을 병행하게 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개표가 완료된 투표지는 법령상 당선인의 임기 동안 보관할 의무가 있다. 일부 절차에서는 투표지와 잔여 투표용지를 봉인 상태로 옮겨 CCTV가 설치된 안전한 장소에 보관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그러나 ‘금고’와 같은 특정 물리적 시설을 명시한 조항은 확인되지 않으며, 보관 방식의 세부 규칙이나 일반 국민의 열람 가능 여부도 공개된 문서에서는 명확하지 않다. 


재검표가 허용되더라도 법원이 지정한 한정된 범위에서만 진행될 수 있다. 2020년 총선 이후 일부 재검표 과정에서 훼손되거나 인쇄 상태가 의심스러운 투표지가 발견되었지만, 법원은 대부분 “절차상 문제는 있으나 선거 결과에 영향을 줄 정도는 아니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대법원의 이런 태도는 “위법의 흔적은 보이지만 결과가 크지 않으니 문제 될 것이 없다”는 식으로 읽히며, ‘도둑이 들었지만 피해가 미미하니 도둑이 아니었다’는 조롱을 불러왔다. 


결국 절차적 하자가 드러나도 결과를 부정하지 않는 판결 구조가, 오히려 국민의 의혹을 더욱 키우는 역설을 만든 것이다.


중앙선관위는 선거 직후부터 홈페이지를 통해 후보자별 득표수, 투표율, 무효표 비율 등 상세한 통계를 공개한다. 수치상으로는 완벽한 투명성을 자랑하지만, 이는 ‘숫자의 투명성’일 뿐 ‘과정의 투명성’을 보장하지는 못한다. 


국민은 투표지를 직접 확인할 수 없고, 전산망의 안전성도 스스로 검증할 수 없다. 제도의 권위만으로 신뢰를 담보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그렇다면 왜 보여주지 못하는가”라는 의문은 점점 더 커진다. 


이 물음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제도의 정당성을 묻는 근본적 질문으로 번진다.


5·18 민주유공자 제도와 선거제도는 겉보기에는 전혀 다른 사안이다. 그러나 불신을 낳는 구조라는 점에서 닮아 있다. 유공자의 범위와 규모는 통계로 확인되지만 명단은 공개되지 않는다. 선거의 득표수와 투표율은 통계로 확인되지만 과정은 국민이 직접 볼 수 없다. 


숫자는 있지만 이름은 없고, 결과는 있지만 검증은 없는 구조. 이것이 민주주의 신뢰를 잠식하는 공통의 병리다. 따라서 문제 제기는 불신을 드러내는 데서 멈추지 않고, 대안을 찾는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가장 간단한 대안으로 사전선거제도의 폐지가 거론되기도 한다. 


그러나 미국, 노르웨이, 캐나다, 스위스 등 선진국 대부분이 조기투표나 우편투표를 운영하는 현실을 무시할 수는 없다. 폐지가 아니라 투명성 강화와 검증 절차 보완이 더 설득력 있는 방향이다. 


투표지 실질 보존 기간을 최소 2~3년 이상으로 늘리고, 선관위가 아닌 독립적 검증기구를 설치해 장비와 소프트웨어를 정기적으로 점검하는 것, 국민이 직접 검증 가능한 수준으로 선거 장비를 공개하는 제도적 개혁이 필요하다. 


민주주의의 신뢰는 숫자의 속도가 아니라 과정의 투명성에서 비롯된다.


다음 편 예고


시리즈 ③편에서는 5·18 민주유공자 제도와 선거제도에 이어, 국가가 제도화한 기억의 문제를 다룹니다. 국가가 정한 진실은 어디까지 신뢰할 수 있는가, 제도화된 기억은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힘이 될 수 있는가를 심층 분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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