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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현수막 규제, 사회적 약자 ‘입틀막’ 논란
  • 김영 기자
  • 등록 2025-11-19 15:4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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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군수 비판도 막았던 행정권, 이제 내용 규제로 확대
  • 현수막은 정치적 소수자·사회적 약자의 마지막 소통 통로
  • 좌파 이념에도 反하는 조치… ‘대통령 심기 경호’ 논란 커져

행안부의 현수막 내용 규제가 시행되면 사회적 약자의 정치적 표현 창구는 근조 띠처럼 ‘닫힌 공간’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그래픽=한미일보]  

행정안전부가 현수막의 ‘내용’까지 판단하겠다는 지침을 발표하면서 정치적 표현의 영역이 행정권의 재량 아래로 들어가는 구조가 만들어지고 있다. 현수막은 정치적 소수자와 사회적 약자가 사실상 유일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통로다. 이 길목을 행정이 틀어쥘 경우 표현의 자유는 물론 민주주의의 형평성까지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정치권에서 군소 정당이 대중에게 자신의 입장을 알리는 가장 손쉬운 수단은 오래전부터 현수막이었다. 비용 부담이 적고, 조직력이나 자금력이 부족한 세력에게는 사실상 유일한 정치적 표현 창구였다. 


오랫동안 이 통로는 좌파 시민단체와 정당이 주도적으로 활용해 온 영역이었다. 그러나 대통령 탄핵 정국 이후 우파 성향의 시민단체와 군소 정당들이 현수막을 통한 의사표시에 본격적으로 나서면서 이 영역은 정치적 균형의 변화와 함께 새로운 쟁점으로 부상했다.


이 과정에서 무엇보다 선명하게 드러난 문제는 기준의 모호함이었다. 같은 문구가 지역에 따라 허용되기도 하고 금지되기도 하면서 행정기관의 자의적 판단이 논란의 중심에 놓였다. 


선거철마다 선거관리위원회가 특정 현수막 문구를 문제 삼아 삭제나 수정을 요구하는 사례가 반복되었고, 실제 피해나 허위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정치적 해석 가능성’을 이유로 제약하는 일도 적지 않았다. 


여기에 대통령의 ‘혐중 시위 깽판’ 발언이 더해지면서 현수막 문제는 단순한 옥외광고물 관리를 넘어 정치적 표현의 자유와 행정 규제가 충돌하는 지점으로 비화했다. 직후 행정안전부가 ‘내용 판단’ 지침을 발표한 것은 이 충돌을 제도로 포장된 조치로 막으려는 것이어서 파장이 클 수밖에 없다.


2024년 말 국가인권위원회는 한 지방자치단체가 군수 비판 현수막의 게시를 거부한 사건에 대해 “행정기관의 자의적 판단이 시민의 정치적 표현의 자유를 침해했다”며 시정 권고를 내렸다. 인권위는 지자체에 옥외광고심의위원회 재구성, 담당 공무원 교육, 조례 정비 등을 요구하며 기본권 침해를 명확히 지적했다. 비판적 정치 표현을 이유로 행정이 내용에 개입할 경우 어떤 결과가 만들어지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선관위의 과거 처분 사례도 구조적으로 다르지 않았다. 특정 문구가 ‘오해의 소지가 있다’거나 ‘정치적 중립 의무 위반’이라는 이유로 반복해서 삭제·수정의 판단이 내려졌지만, 그 판단 기준에선 일관성을 찾기 어려웠다. 같은 문구가 어떤 곳에서는 허용되고 다른 곳에서는 금지되면서, 행정권의 재량이 정치적 성향에 따라 흔들린다는 비판이 이어졌다. 행안부 지침이 시행되면 이 같은 자의적 판단이 제도적 형태로 더욱 굳어질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되는 이유다.


무엇보다 현수막은 단순한 홍보물이 아니다. 제도권 정치의 주변부에 놓인 정치적 소수자와 사회적 약자에게는 사실상 유일한 정치적 표현 창구다. 거대 조직과 자본을 가진 세력은 언제든 언론과 온라인·미디어 플랫폼을 통해 자신들의 메시지를 발신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에게 현수막은 존재 자체를 증명할 수 있는 마지막 자원이다. 


이런 구조를 고려하면 이번 행안부 조치는 표현의 자유라는 보편적 기준뿐 아니라, 좌파가 스스로 강조해 온 ‘사회적 약자 보호’라는 이념적 기준에도 정면으로 반한다. 약자의 발언 창구를 먼저 제한하는 조치엔 정치적 목적이 깔린 게 아니냐는 비판이 당연히 제기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정치권과 시민사회 일각에서는 이번 지침을 두고 “정책이 아니라 정치적 고려” “대통령 심기 경호용 규제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규제의 목적이 공익이 아니라 불편한 비판을 차단하는 데 있다면, 이는 민주주의의 형평성과 정치적 공정성 전체를 흔드는 위험한 선택이기 때문이다. 


선관위를 상대로 한 현수막 소송에서 승소 경험이 있는 박주현 변호사는 “행안부 지침은 법률이 아니라 내부 규칙에 불과해 국민을 직접 구속할 수 없다”며 “지침에 기대 지자체가 내리는 게시 불허 처분은 재량권 일탈·남용 논란이 불가피하고, 소송을 통해 취소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그는 또 “표현의 자유처럼 상위 기본권을 제한하는 기준은 반드시 법률로 정해야 하는데, 이를 행정지침으로 대체한 것은 헌법적 한계를 벗어난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이러한 지침에 대해선 어떤 법적 대응이 가능할까. 지침 자체는 행정규칙이라 직접 취소소송의 대상이 되지 않지만, 이 지침을 근거로 내려진 ‘게시 불허 처분’에 관해서는 소송으로 다툴 수 있다. 


법원은 그 과정에서 지침의 위법성과 상위법 위반, 재량권 일탈·남용 여부 등을 함께 판단하게 된다. 또한 지침이 사실상 강제력을 갖고 표현의 자유를 직접 제한하는 구조라면 헌법소원도 가능한 사안이다. 지방의회 조례 개정 등으로 지침의 적용을 현장에서 배제할 수도 있다.


현수막은 표현 창구의 자원이 없는 이들에게 남아 있는 거의 마지막 정치적 발언 통로다. 그 통로가 행정 해석 하나로 좁아질 경우, 표현의 자유는 시민에서 행정권으로 무게 중심이 이동한다. 


필요한 것은 규제가 아니라 명확한 법률 기준에 근거한 최소한의 제한이며, 그 기준이 정권의 성향이나 행정기관의 판단에 따라 흔들리지 않도록 하는 절차적 안정성이다. 


표현의 자유는 때로 불편함을 감수함으로써 유지된다. 그 원칙이 흔들리는 순간, 민주주의의 기반도 함께 흔들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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