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9월 국가보안법 합헌에 대한 헌법재판관별 판단 결과. 연합뉴스
편집위원·육사 40기지난 12월1일, 32명의 국회의원이 국가보안법폐지안을 공동 발의했다. 국회는 오래된 불편한 논쟁을 다시 꺼내 들었다. 국가보안법이 한 때 소수의 인권을 억압했다고 기억하는 이들에게 이 법은 강압적 시대의 잔상처럼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법을 단순히 과거의 유물로 보고 폐지할 게 아니다. 그동안 불확실한 안보 상황에서 국가보안법이 어떤 역할을 했고, 현재의 안보 현실 속에서 어떤 기능을 하고 있는지를 냉정하게 따져 보아야 한다.
대한민국은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정전협정 중에 있는 국가다.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은 잠시도 완전히 풀린 적이 없다. 북한은 여전히 폐쇄성과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한 치명적 군사력, 체제 유지를 위한 강압적 전략을 유지하며, 대한민국을 적대 대상으로 규정하고 있다. 32명의 국회의원이 자유체제 유지에 불리한 환경을 외면한 채 국가보안법의 어두운 역사만을 근거로 폐지를 주장하는 것은 폭설 속에서는 우산이 불편하니 버리자는 주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
국가보안법은 1948년 ‘여수·순천 14연대 반란사건’ 직후 제정되었다. 이 법은 건국 초기 좌익 무장봉기를 진압하기 위한 방파제로 출발했다. 1949년 개정으로 법은 한층 강화돼 대규모 검거와 단체 해산으로 이어졌고, 1953년 폐지가 시도됐지만 냉전의 압력 속에서 유지되었다. 1980년 5공화국은 반공법을 흡수하며 법을 다시 강화했고, 이는 민주화 세력 탄압의 도구로 인식되었다. 빛이 강하면 그림자가 생겨날 수밖에 없듯이, 국가보안법이 기능을 발휘할수록 법 자체가 불편해진 사람들도 증가했다.
국가보안법이 불편한 유형은 두 가지다. 하나는 과거 권력이 이 법을 이용해 민주화 운동을 탄압했던 상처를 기억하는 운동권과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해치려는 세력이다. 북한의 조직적 간첩 활동, 사이버 공격, 북한과 중국에 의한 여론 조작, 위장 단체 활동 등 실재하는 위협에 가담하는 이들은 국가보안법이 활동을 제약하기에 직접적인 불편함을 느낄 것이다. 국가보안법을 불편해하는 주체가 누구인지를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이 법이 필요하다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
국가보안법은 1991년 5월 31일 일부 개정으로 국가안보 기능은 유지하되, 법 적용의 자의성을 줄이려는 제도적 조정이 있었다. 1992년 4월 14일 일부 개정은 헌법재판소의 제7조 및 제10조의 구속기간 연장을 허용한 규정에 대해 ‘위헌’ 결정을 반영하여 절차적 기본권 보호를 강화했다.
1998년 이후에는 폐지·개정·존치 논쟁이 이어지며 국가보안법은 안보와 인권을 놓고 진영간의 논쟁 사안이 되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국가보안법 피해자였으나, 당선 후에는 폐지가 어렵다는 입장을 취했다. 이후에도 민주화 시대의 흐름 속에서 법의 악용 가능성과 인권침해 문제로 폐지 또는 개정 논의가 지속적으로 이어져 왔다. 그동안 국가안법은 폐지보다는 정밀한 개정 논의가 우세했지만, 지난 12월 1일, 32명의 국회의원이 또 국가보안법 폐지안을 들고 나온 것이다.
북한의 대남 적화전략은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노동당 규약에는 여전히 대한민국 체제 전복과 적화통일이라는 목표가 명시돼 있다. 남북 대화가 이어지던 시절, 정상회담을 하면서도 북한은 내부 문건에서 대한민국을 ‘투쟁의 대상’으로 규정해왔다. 지난 10년간 드러난 북한에 의한 안보 위해 사례만 보더라도, 지역별 간첩단 구성, 무차별 사이버 공격, 해외 위장 활동, 국내 정치 사주 및 선동 등 대남 혼란 조성과 적화 책동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폐지론자들은 국가보안법 대신 형법, 테러방지법, 정보통신망법 등을 활용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형법의 내란죄나 외환죄는 이런 특수한 위협을 포괄적으로 규율하기 어렵다. 북한의 공작은 조직과 목적, 은밀한 연계성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반국가 반역 세력을 잡아내고 의법 처리할 수 있는 법적 틀은 현실적으로 국가보안법이 유일하다.
국가보안법 대체입법의 설계도와 실행 체계가 완전히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폐지법안을 들고 나온 것은 77년 동안 쌓아온 안보 방파제를 뜯어내자는 주장과 같다. 안보는 공백을 허용하지 않는다. 법적 공백이 단 몇 주만 생겨도 체제 전복을 목표로 움직이는 외부 세력이 그 틈을 파고든다.
국가보안법이 완전한 법은 아니다. ‘찬양·고무’ 조항처럼 자의적 해석의 여지가 있는 부분은 더 엄격하게 정비해야 한다. 수사 절차의 인권침해 가능성도 철저하게 통제해야 한다. 그러나 악용될 가능성을 이유로 필요한 기능까지 없애는 것은 구더기 생긴다고 된장을 담은 항아리를 깨자는 짓이다. 국가의 안전장치를 한번 폐지하면 되돌리기 어렵고, 그 결과는 미래 세대가 감당하게 된다. 국가보안법 폐지보다 인간의 양심과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각종 ‘역사 왜곡 처벌법’ 폐지가 우선이다.
자유통일 이전까지 대한민국은 고위험 안보 위협을 이겨야 한다. 선(善)과 정의와 진실도 악다구니 세력의 힘에 밀리면 악으로 추락하는 세상이다. 모든 법처럼 국가보안법도 완벽하지 않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는 최소한의 방어선이다. 이 방어선을 허무는 폐지 법안은 특정 정당의 정치적 구호로는 짜릿할 수 있으나, 국가의 안전과 생존과 국민의 생명이 걸린 매우 무거운 사안이다.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신봉하는 우리는 국가보안법 폐지를 막아야 하는 절체절명의 사명과 책임이 있다.
국가보안법은 정밀한 개정은 허용할 수 있어도 폐지는 용인할 수 없다.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미래 세대의 자유와 안전이다. 손자와 손녀가 사랑스럽고 소중하다면 단편적인 일시적 손주 사랑과 자랑보다는 그들이 살아갈 세상의 안전장치를 지키고 마련해 주어야 한다. 우리의 우선적 안전장치는 국가보안법 존속이다.
그동안 안보 역사는 국가보안법이 필요했던 충분한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의회 폭거에 밀려서 마지막 안보 방패를 내려놓는 순간, 누적된 위험이 우리의 자유체제를 일거에 허물 것이기에 우리는 국가보안법 폐지에 결사 반대한다.
한미일보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