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2일 한국은행에서 열린 시무식에서 신년사를 발표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최근 원·달러 환율이 1440원대 후반에서 등락을 이어가자 한국은행의 설명을 둘러싼 시장의 반응이 심상치 않다.
한국은행은 “현재 환율 수준은 경제 펀더멘털을 반영하지 않는다”, “시장 기능은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입장을 반복하고 있지만, 외환시장과 투자자들의 체감은 다르다.
문제는 환율 수준 그 자체보다, 한은의 판단 기준에 대한 시장의 신뢰가 바닥 수준이란 점이다.
한국은행은 전통적으로 특정 환율 숫자를 방어선으로 설정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강조해 왔다. 대신 변동성, 수급 구조, 펀더멘털과의 괴리, 시장 기능 정상 여부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 기준으로 삼는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 기준들은 공통된 약점을 갖는다. 정량적 기준이 공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느 정도의 변동성이 ‘과도한지’, 어떤 지표 조합에서 ‘펀더멘털 괴리’가 성립하는지, 그 판단이 언제 해소되는지는 외부에서 검증할 수 없다.
이 같은 설명 방식은 위기 국면에서 반복될수록 신뢰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한은은 고환율 국면에서도 “펀더멘털은 양호하다”고 말하지만, 동시에 외환시장에서는 스무딩 오퍼레이션으로 해석되는 개입 정황이 반복적으로 포착된다.
공식 메시지는 안정인데, 실제 행동은 방어에 가깝다는 인식이 쌓이면서 시장은 한은의 언어보다 행동을 기준으로 상황을 해석하기 시작했다.
특히 최근 환율 변동을 ‘연기금 해외투자, 실수요’로 설명하는 대목에서 불신은 더 커졌다.
연기금의 해외투자 확대나 수입 결제 수요는 새로운 변수가 아니라 이미 시장에 내재된 구조적 요인이다. 그럼에도 환율이 특정 시점에 민감하게 반응했다면, 시장은 이를 관리 능력의 문제로 해석한다.
“실수요 때문”이라는 설명은 원인 규명이라기보다, 통제 불가능성을 인정하는 문장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또 하나의 요인은 설명의 시간 구조다.
한국은행의 메시지는 대체로 사후적이다. 환율이 급변한 뒤 “과도한 움직임”, “펀더멘털 괴리”를 설명하는 방식이 반복된다.
반면 시장이 원하는 것은 최악의 경우 어디까지 열려 있는지, 어떤 조건에서 개입이 강화되는지에 대한 사전적 가이드라인이다.
이 간극이 좁혀지지 않으면서, “한은 설명은 항상 늦다”는 인식이 고착화되고 있다.
이 같은 불신은 단순한 정서 문제가 아니라 실제 투자 행동으로 이어지고 있다.
최근 시장에서는 원화 자산 회피, 달러 보유 선호, 단기 환율 고점 경계와 같은 움직임이 동시에 나타난다.
이는 환율 방향에 대한 확신이라기보다, 정책 신호에 대한 신뢰 약화가 만들어낸 방어적 선택에 가깝다.
결국 문제의 핵심은 환율이 1450원이냐 1430원이냐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은행이 무엇을 기준으로 판단하고, 언제 어떤 방식으로 대응하는지에 대한 예측 가능성의 상실이다.
시장은 위기를 과장해서가 아니라, 기준을 알 수 없기 때문에 보수적으로 반응한다.
한은이 직면한 과제는 환율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설명이 신뢰로 연결되는 구조를 회복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안정적”이라는 말은 반복될수록 설득력을 잃게 될 가능성이 크다.
김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