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찬진 금융감독원장 [사진=연합뉴스]
‘지배구조 개혁’이라는 이름의 문제 제기
금융지주 회장 연임 절차를 강화하겠다는 정부 방침이 ‘지배구조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제시되고 있다.
사외이사 중심의 임원후보추천위원회가 사실상 회장의 연임을 좌우해 왔다는 비판, 장기 연임이 이사회와 결합해 폐쇄적 구조를 만들었다는 문제 제기 자체는 낯설지 않다.
실제로 금융당국은 지배구조 선진화를 명분으로 한 태스크포스(TF)에서, 이사회 독립성 논의와 함께 금융지주 회장 선임·연임 절차를 어떻게 통제할 것인지까지 논의 범위에 포함시키고 있다.
그러나 문제의 진단과 처방은 일치하지 않는다.
지금 논의되는 방식은 지배구조를 바로잡는 개혁이라기보다, 금융지주 회장직을 정치적 판단의 장으로 이동시키는 설계에 가깝다.
특별결의는 ‘시장 판단’인가, 정치 신호의 집계인가
정부가 검토 중인 핵심은 회장 연임을 주주총회 특별결의 대상으로 묶는 것이다. 출석 주주의 3분의2 이상 동의를 받아야 연임이 가능하도록 문턱을 높이겠다는 구상이다.
사외이사 몇 명이 좌우하던 구조에서 벗어나 주주의 통제권을 강화한다는 명분이 붙는다.
표면적으로는 민주적이고 시장 친화적인 방식처럼 보인다.
그러나 한국 금융지주의 지배구조 현실을 고려하면 이 절차는 ‘시장 판단’이라기보다 ‘정치 신호의 집계’로 작동할 가능성이 크다.
한국 금융지주에는 절대적 대주주가 없다. 연기금과 기관투자자의 비중이 크고, 외국인 주주는 정책 리스크와 단기 성과에 민감하다. 개인 주주의 영향력은 제한적이다.
이런 구조에서 주총 3분의2 찬성은 회장의 성과만으로 만들어지기 어렵다.
정책 기조와 감독당국의 시선, 정권의 메시지가 주주 판단에 자연스럽게 스며든다.
결국 연임 절차는 지배구조 평가가 아니라 ‘정권과의 거리’를 재는 정치적 시험대로 변질될 수 있다.
회장직은 경영이 아니라 권력의 정점이다
이 지점에서 금융지주 회장의 역할은 근본적으로 달라진다.
금융지주 회장은 각 계열사의 집행을 직접 담당하는 경영자가 아니라, 그룹 전략과 인사, 거버넌스를 총괄하는 지배구조의 정점이다.
그럼에도 연임 여부가 특별결의라는 정치적 문턱에 걸리게 되면, 회장은 장기 전략보다 주총 구도를 먼저 계산하게 된다.
시장의 평가보다 정책 신호를 선해석하는 것이 합리적 선택이 된다. 금융지주 회장직의 정치화가 시작되는 지점이다.
구조는 그대로, 책임만 흩어졌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정부가 비판해 온 사외이사 중심 구조가 사실상 그대로 유지된다는 점이다.
임원후보추천위원회는 여전히 단독 후보를 추천하고, 이사회 구조 역시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달라지는 것은 마지막 승인 방식뿐이다.
이는 구조 개혁이라기보다 책임 분산에 가깝다. 향후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이사회도 했고, 주주도 동의했다”는 말이 가능해진다. 판단의 주체는 늘어나지만, 책임의 주체는 흐려진다.
권력은 줄지 않았다, 더 넓게 퍼졌을 뿐이다
정부는 이를 지배구조 개선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 방식은 권력의 개입을 줄이기보다, 그 영향력을 더 넓히는 설계에 가깝다.
사외이사 몇 명에게 집중돼 있던 판단은 주주총회로 옮겨가지만, 그 주주총회는 정치·정책 신호에 민감한 기관투자자와 연기금이 좌우한다.
직접 지시하지 않아도, 직접 개입하지 않아도, 모두가 같은 신호를 먼저 해석하게 되는 구조다.
권력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더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더 넓은 범위에 스며든다.
이찬진 금융감독원장(왼쪽에서 여섯번째)이 10일 오후 서울 중구 전국은행연합회에서 열린 금융감독원장-금융지주 회장 간담회에서 참석자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2025.12.10 [사진=연합뉴스]
이것이 정경유착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이 지점에서 묻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정경유착이 아닌가.
물론 과거처럼 정치가 특정 인물을 지명하고, 금융이 대가를 제공하는 노골적 거래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방식만 달라졌을 뿐, 구조는 더 정교해졌다. 정치가 직접 인사에 개입하지 않는 대신, 인사가 통과해야 할 정치적 문턱을 제도로 설계하는 방식이다.
아이러니는 여기서 완성된다.
산업자본의 금융 지배를 막겠다며 외쳐온 ‘금산분리’ 논리는, 본래 금융의 자율성을 지키기 위한 장치였다. 그런데 지금은 그 빈자리를 정치적 영향력이 채우고 있다.
대주주는 없고, 책임질 주인도 없는 금융지주 위에 정치적 판단만 얹히는 구조가 만들어지고 있다.
이것이 정경유착이 아니라면, 우리는 무엇을 그렇게 불러야 하는가.
개혁이 아니라 권력의 확장이다
장기 연임 자체가 본질적 문제였던 것은 아니다.
문제는 검증 구조의 부재였다.
성과를 어떤 기준으로 평가하는지, 실패했을 때 어떤 책임을 지는지, 외부 검증은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설계가 없었다.
이 공백을 찬반 비율로 메운다고 해서 제도가 성숙해지지는 않는다. 특별결의는 절차를 강화할 뿐, 판단의 질을 보장하지 않는다.
금융은 정치와 거리를 유지할수록 신뢰를 얻는다.
정책 방향은 중요하지만, 지배구조의 정점까지 정치적 신호로 관리되는 순간 금융 시스템은 단기화된다.
금융지주 회장이 시장과 성과가 아니라 정치적 기류에 따라 연임 여부를 걱정해야 하는 구조는, 결국 금융의 안정성과 보수성을 훼손한다.
그 비용은 금융권 내부가 아니라 시장과 국민에게 돌아간다.
지금 필요한 것은 연임을 어렵게 만드는 장치가 아니다.
투명한 성과 지표, 독립적 검증, 실패에 대한 명확한 책임 구조다.
그것 없이 연임 문턱만 높이면, 금융지주 회장은 전략가가 아니라 정치적 생존자가 된다.
이것이 과연 개혁인지, 아니면 통제의 방식만 바꾼 권력의 확장인지, 이제 답해야 할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