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보스 포럼을 전후로 미국 보수 진영에서는 선거 관리 시스템의 신뢰 문제를 ‘제도 논쟁’이 아닌 ‘안보 의제’로 격상시키는 발언들이 이어졌다. [사진=백악관]최근 세계선거기구연합(A-WEB)을 둘러싼 논란은 국내 언론에서는 비교적 조용히 다뤄지고 있다.
그러나 해외 정치·정책 커뮤니티와 국제 안보 담론의 흐름을 살펴보면, 선거 제도의 공정성과 투명성, 그리고 외국의 기술·정보 개입 가능성은 더 이상 주변적 이슈가 아니다.
선거는 이제 민주주의의 절차적 문제를 넘어 국가 안보와 기술 주권의 영역으로 이동하고 있다.
이 같은 변화는 최근 국제 정치 무대에서 더욱 분명해지고 있다. 다보스 포럼을 전후로 미국 보수 진영에서는 선거 관리 시스템의 신뢰 문제를 ‘제도 논쟁’이 아닌 ‘안보 의제’로 격상시키는 발언들이 이어졌다.
해외에서 제기되는 ‘의혹’의 성격
특정 국가를 직접 지목하지 않더라도, 선거 시스템의 취약성이 국가 주권과 직결될 수 있다는 문제의식이 공유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실리콘밸리 출신 정책 인사들 역시 디지털 신원 인증, 플랫폼 통제, 국가 차원의 데이터 관리가 자유민주주의의 핵심 가치와 어떤 긴장을 형성하는지를 공개적으로 논의하고 있다. 한국의 디지털 행정 시스템이 이러한 논의 과정에서 언급된 사례도 있었다.
이는 한국 선거의 정당성을 단정적으로 문제 삼았다기보다, 디지털 통제와 민주주의 신뢰의 관계를 둘러싼 국제적 문제 제기의 일부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최근 일부 미국 내 정치·안보 커뮤니티에서는 한국의 선거 관리 제도와 중앙선관위를 거론하는 과격한 표현들이 등장하기도 했다.
이러한 주장들은 공식 정보기관이나 사법 판단과 동일선상에서 다뤄질 수는 없겠으나, 다만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이 같은 주장들이 진공 상태에서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전자투·개표 시스템, 국제 선거 협력 기구, 선거 기술의 수출과 표준화 문제는 이미 서구 민주주의 내부에서도 오랜 논쟁의 대상이었다.
독일 연방헌법재판소가 전자투표제를 위헌으로 판단했고, 네덜란드가 수차례 검증 끝에 전자투·개표를 폐기한 이유 역시 선거 결과의 ‘조작 가능성’ 때문이라기보다, 시민이 이해하고 검증할 수 없는 제도는 민주주의의 신뢰를 훼손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이러한 국제적 맥락 속에서 A-WEB과 한국의 선거 관리 시스템이 언급되고 있다는 점은, 사실 여부를 떠나 신뢰 관리 측면에서 경고 신호로 읽을 필요가 있다.
중국 개입 논쟁과 선거의 ‘안보화’
또 하나 주목할 변화는, 선거 문제가 외국의 영향력 작전과 결합해 논의되고 있다는 점이다. 베네수엘라의 사례에서 보듯, 선거 신뢰가 붕괴될 경우 국제 사회의 불인정과 정권 불안정으로 이어질 수 있다.
캐나다는 공공조사위원회를 통해 중국의 선거 개입 의혹을 공식적으로 조사했고, 호주는 외국 간섭법을 적용해 교민 사회와 정치권을 겨냥한 영향력 작전에 강경 대응하고 있다.
이들 국가는 공통적으로 선거를 ‘정치 공방의 대상’이 아니라 ‘국가 안보 시스템’의 일부로 관리하고 있다. 문제 제기의 출발점이 어디였든, 제도권이 이를 방치했을 때 발생하는 비용이 얼마나 큰지를 이미 경험한 셈이다.
이런 국제 환경 속에서 김민전 의원이 A-WEB과 전자투·개표 시스템을 둘러싼 논란을 제기한 것은, 특정 주장을 확대 재생산하기 위한 시도가 아니다.
서구 민주주의 국가들의 제도적 판단과 국제적 논쟁을 근거로, 한국의 선거 관리 제도 역시 신뢰의 관점에서 점검이 필요하다는 문제 제기에 가깝다.
중요한 것은 이 논의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의 문제로 축소하지 않는 것이다. 선거 제도는 시민에게 신뢰를 요구하는 대상이 아니라, 의심이 제기되지 않도록 설계되고 관리돼야 할 공공 시스템이다. 제도권 정치가 해야 할 일은 의혹을 단속하는 것이 아니라, 왜 이런 의심이 국제적으로 반복되는지를 설명하고, 제도적으로 해소하는 것이다.
선거를 둘러싼 논쟁에 답할 책임
선거를 둘러싼 국제 논쟁은 이미 ‘부정’이라는 단어를 넘어섰다. 지금 논의의 중심은 무결성, 투명성, 기술 주권, 그리고 외국 개입에 대한 제도적 방어 능력이다. 한국만 이 흐름에서 예외일 수는 없다.
A-WEB 논란 역시 누군가의 주장을 옳고 그름으로 재단할 문제가 아니라, 한국 민주주의가 세계 속에서 어떤 기준으로 신뢰를 관리하고 있는지를 점검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침묵이나 방어로는 신뢰를 지킬 수 없다. 공개적인 설명과 제도적 점검, 그리고 정치의 책임 있는 대응만이 해법이다.
선거는 결과로만 정당화되지 않는다.
과정이 이해 가능하고 제도가 의심받지 않을 때, 민주주의는 비로소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다.
◆ 심규진 교수
스페인IE대학교 디지털미디어학과 교수. 전 국방부 정책자문위원과 전 여의도연구원 데이터랩 실장을 역임했으며 호주 멜버른 대학교 전임교수와 싱가포르 경영대학교 조교수로 근무했다. 저서에 ‘K-드라마 윤석열’ ‘하이퍼 젠더’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