尹 변호인 “선관위 中 간첩단 사건, 미국 조사 끝나면 발표 가능성” 재조명
“수원 선관위 연수원에 있던 중국인 99명이 오키나와 미군 부대에 가서 조사를 받았고 부정선거에 대해 자백했다는 뉴스가 나왔습니다. 미국에서 그걸 조사했다면 이제 발표를 하겠죠. 그걸 밝히기 위한 비상계엄이 국헌 문란이고 대통령이 퇴직해야 될 사례라는 데 극히 의문이 듭니다.” 미국발 부정선거 진실 규명 소식이 속속 전해지면서 지난해 헌법재판소 탄핵심판에서 윤석열 대통령의 변론을 맡은 배진한 변호사가 부정선거와 관련해 언급한 내용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어린왕자’ 표지 부분. [출판사=문학동네]
흔히 문학책 읽는 일을 두뇌활동으로 생각한다.
문장을 해석하고, 인물의 행동을 파악하고,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가며 뜻을 정리하는 과정을 머리 쓰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학교에서 배운 독서 방식도 대부분 이런 틀 위에 놓여 있다.
그러나 실제 독서의 출발점은 두뇌활동이 아니다. 문학은 언제나 생각보다 마음을 먼저 건드린다.
문학의 출발점은 ‘머리’ 아닌 ‘마음’
책장을 펼쳐 첫 문장을 읽는 순간을 떠올려 보자. 아직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지도 않았다. 인물이 누구인지,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다. 그런데도 독자는 이미 반응한다. 글이 밝은지 어두운지, 편안한지 불안한지 같은 느낌은 바로 전달된다.
이 반응은 공부를 많이 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언어를 받아들이는 방식 자체가 그렇다. 말은 뜻을 전달하기 전에 먼저 분위기를 만든다.
이 점은 ‘어린 왕자’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비행사가 사막에 불시착하고, 거기서 어린 왕자를 만난다는 설정만 보면 동화처럼 보인다.
하지만 몇 쪽만 읽어도 독자는 금방 느낀다. 이 작품이 단순히 귀여운 이야기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어른들의 세계를 바라보는 냉소, 고독한 시선, 조용한 슬픔이 문장 곳곳에 깔려 있다. 독자는 그 의미를 정리하기 전에 이미 그런 분위기에 젖어든다.
이처럼 문학은 설명보다 먼저 느낌을 전달한다. 독자는 뜻을 이해하기 전에 이미 끌리거나 멀어진다. 이것이 이해보다 앞서는 감정 반응이다.
고전소설에서도 마찬가지다. ‘죄와 벌’을 떠올려 보자.
라스콜리니코프의 사상과 논리를 모두 파악하기 전부터 독자는 답답함을 느낀다. 좁은 방, 눅눅한 공기, 반복되는 불안한 생각이 마음을 조인다. 독자는 그의 생각을 정리하기 전에 이미 숨이 막히는 기분을 경험한다. 머리가 아니라 몸이 먼저 반응하는 것이다.
한국 문학에서도 이런 예는 흔하다. ‘소나기’를 읽으면 아이들의 만남과 비 오는 풍경만으로도 마음이 가라앉는다. 아직 병도, 죽음도 나오지 않았는데 이미 이별의 기운이 감돈다.
독자는 이 작품의 비극을 논리적으로 이해해서 슬퍼지는 것이 아니다. 먼저 슬픈 상태가 되고, 그 위에서 이야기를 따라간다.
이런 반응이 이어지면 공감이 생긴다. 공감은 머리로 계산해서 만들어지는 감정이 아니다. 비슷한 기운이 먼저 전달되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된다. 그래서 독자는 인물의 사정을 다 알기도 전에 그 인물에게 마음을 준다.
‘데미안’을 읽는 많은 독자가 그렇다. 싱클레어의 불안과 흔들림은 청소년기의 감정과 쉽게 겹쳐진다. 그 결과 독자는 싱클레어의 방황을 거의 자동으로 받아들인다. 그의 선택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 다른 길은 없었는지보다, 그 마음 상태에 오래 머문다. 공감이 앞서기 때문이다.
현대소설도 예외는 아니다. ‘82년생 김지영’을 읽을 때 많은 독자는 주인공의 답답함과 피로를 자신의 일처럼 느낀다. 직장과 가정에서 쌓인 감정이 익숙하기 때문이다.
이 공감이 강해질수록 독자는 작품을 거리 두고 바라보기 어려워진다. 작품을 비판하는 말은 곧 주인공을 부정하는 말처럼 들린다. 마음이 먼저 결론을 내려버렸기 때문이다.
공감이 과잉이 진정한 독서 방해
이처럼 공감은 문학 독서에서 매우 강력한 힘을 가진다. 그러나 이 힘이 모든 자리를 차지하면 문제가 생긴다. 공감이 기준이 되면 작품은 단순해진다.
문학에서는 언제나 마음이 먼저 움직인다. 이것은 인간 인식의 기본 구조다. 다만 그 마음이 끝까지 자리를 차지하면 문학은 소비되고 사라진다.
많이 울면 좋은 작품이 되고, 불편하면 나쁜 작품이 된다. 문장의 구성이나 이야기의 짜임, 표현의 밀도는 뒤로 밀린다. 문학은 사고를 넓히는 도구가 아니라 감정을 확인하는 도구로 변한다.
이 현상은 특히 비극적인 작품에서 두드러진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읽을 때 독자는 가난한 가족의 처지에 먼저 마음이 쏠린다. 연민과 분노가 앞선다.
그 감정이 강할수록 작품이 담고 있는 사회 구조의 복잡함이나 인물들의 한계는 잘 보이지 않게 된다. 감정의 여운이 생각의 자리를 밀어낸다.
이때 흔히 “생각이 멈춘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생각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역할이 바뀐다. 작품을 살피던 생각이, 이미 느낀 감정을 지키는 쪽으로만 움직인다.
마음에 들지 않는 장면은 넘기고, 마음에 맞는 장면만 붙잡는다. 스스로는 사고하고 있다고 느끼지만, 실제로는 감정의 울타리를 더 튼튼하게 만들고 있을 뿐이다.
이런 독서 방식은 개인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여러 사람이 같은 작품에 같은 감정을 느끼면, 그 작품은 쉽게 보호의 대상이 된다.
작품에 대한 분석이나 비판은 공격처럼 받아들여진다. 문학을 둘러싼 대화는 줄어들고, 감정의 공유만 남는다. 작품은 생각을 나누는 계기가 아니라, 같은 편임을 확인하는 표시가 된다.
감각과 사고의 균형 맞춰야
문학 교육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반복된다. 작품을 읽고 느낀 점을 말하게 하면, 학생들은 자신의 감정을 정리하는 데서 멈춘다. 물론 이 과정 자체는 의미가 있다. 하지만 거기서 끝나면 독서는 쌓이지 않는다. 읽을 때마다 비슷한 감정만 남고, 그 감정은 금방 사라진다.
문학의 힘은 감정을 흔드는 데 있다. 동시에 위험도 거기에 있다. 감정은 독서를 시작하게 만들지만, 끝까지 대신해서는 곤란하다. 감정만 남으면 독서는 체험으로 끝난다. 체험은 강렬할 수 있지만, 반복될수록 얕아진다. 매번 새롭게 시작하고, 매번 같은 자리에서 끝난다.
그래서 문학 독서에는 의도적인 느림이 필요하다. 마음이 가장 크게 움직인 지점에서 속도를 낮추는 태도다. 어떤 말과 장면이 이런 반응을 만들었는지를 돌아보는 일이다.
이 과정이 시작될 때 비로소 이해가 개입한다. 이해는 감정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감정이 지나간 자리를 정리하는 역할을 한다.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문학에서는 언제나 마음이 먼저 움직인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 인식의 기본 구조다. 다만 그 마음이 끝까지 자리를 차지하면 문학은 소비되고 사라진다.
감정은 문을 여는 역할까지만 맡아야 한다. 그 문 안에서 방향을 잡는 일은 사고의 몫이다. 이 균형이 지켜질 때 문학은 읽히고 잊히는 것이 아니라, 남아서 독자의 세계를 넓힌다.

◆ 松山
시인이자 역사·철학 연구자. 이승만학당 이사를 역임했으며 현재 한국근현대사연구회 연구 고문, 철학 포럼 리케이온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시집 네 권을 출간했고 ‘후크고지의 영웅’을 공동 번역했다. 松山은 필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