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냐민 네타냐후(오른쪽) 총리는 엘리트 특수부대에서 복무했다.
최근 정부의 내란 가담 조사 태스크포스가 수사 의뢰한 110명 중 108명이 군인이었다. 징계를 요청한 89명 가운데 48명 또한 군인이다. 군을 향한 수사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고 한다.
책임 규명은 필요하다. 그러나 안보의 최전선에 선 집단이 집단적 의심과 소환의 대상으로 고착되는 현실은 냉정히 돌아볼 문제다. 전투 준비와 전력 유지에 집중해야 할 군이 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반복적으로 조사와 압박의 중심에 놓이는 상황이 과연 바람직한가.
대한민국은 50만 명이 채 되지 않는 병력으로, 수십 기의 전술핵을 포함한 대량 살상 능력을 보유한 북한의 100만 군대와 대치하고 있다.
이런 조건에서 군은 상시적 불신의 대상이 아니라 신뢰의 기반 위에 서 있어야 한다. 안보의 무게를 체득하지 못한 권력이 군을 통제의 객체로만 바라보는 순간, 국가의 억지력은 눈에 띄지 않게 약화된다.
합법 아닌 ‘자격’의 문제
이재명·김민석·정청래·안규백 이들의 공통점은 병역(兵役) 미필자다. 법적 절차상 아무리 사유가 정당했을지라도 국민의 눈높이와 도덕적 잣대는 결코 법전의 조문 안에 갇혀 있지 않다.
불교의 연기(緣起)는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는 상호 의존과 책임의 원리다. 누군가가 누리는 평화와 권력은 반드시 다른 누군가의 희생과 헌신에 뿌리를 두고 있다.
GOP(일반전방소초)에서 살을 에는 추위를 견디는 병사, 창공에서 목숨을 건 공군, 거친 파도와 사투를 벌이는 해군의 고독이 있기에 오늘의 정치가 존재한다.
이 연기적 연결고리를 몸으로 체득하지 못한 채 안보를 논하는 것은, 타인의 고통에 빚진 자가 그 빚을 망각한 채 권리만을 휘두르는 오만이다.
군대는 추상적 관념의 전쟁터가 아니다. 젊은 청춘을 국가에 헌신하는 생명의 현장이다. 직접 DMZ를 누비고 공수훈련, 유격훈련, 거친 파도의 UDT 체험을 하지 않은 안보 전략은 현장의 진실을 외면한 공허한 연극에 불과하다.
수만 명의 생사를 가를 명령의 무게는 서류상의 합법이 아니라, 현장의 고진(苦盡) 훈련을 몸소 느끼는 동체대비(同體大悲)의 자각에서 나와야 하기 때문이다.
합법이라는 외피가 도덕적 결함까지 가려주지는 않는다. 병사들의 헌신을 담보로 정치를 논하면서 정작 그 헌신의 무게를 모르는 지도자는, 기초가 부실한 장마철 흙담처럼 위태롭다.
연기적 자각이 결여된 자에게 국가의 안위를 맡기는 것은 국민의 상식과 도덕적 눈높이에 반하는 일이다. 이제 법적 면죄부 뒤에 숨지 말고, 그들이 짊어지지 않은 몸의 기억에 대해 국민 앞에 엄중한 자격을 증명해야 한다.
이스라엘이 던지는 질문
이스라엘을 보라. 이스라엘의 정치 지도자들은 대체로 군 복무의 무게를 통과한다.
이츠하크 라빈은 독립전쟁과 중동전쟁을 직접 치른 장군 출신 총리였고, 에후드 바라크는 특수부대 사령관으로 수 차례 실전을 경험한 인물이다.
현 총리 베냐민 네타냐후 또한 엘리트 특수부대에서 복무하며 동생을 전투에서 잃었다. 이들에게 안보는 이론이 아니라 기억이며, 정책이 아니라 상처다.
사방이 적대적 환경에 놓인 그 사회에서 안보는 관념이 아니라 삶의 조건이다. 정치 지도자 상당수가 군 복무를 통해 국가 방위의 무게를 체험한다. 전장을 아는 자가 국가의 방향을 결정한다는 문화적 토대가 분명히 존재한다.
그들에게 안보는 선거 전략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다.
“당신은 이 나라를 위해 무엇을 바쳤는가?”
대한민국도 물어야 한다.
군 경험은 사적인 이력이 아니라 공적 책임의 토대다. 겪지 않았다면 더 겸허해야 하고, 알지 못한다면 더 배우려 해야 한다.
군대를 모르는 권력, 과연 안보를 말할 자격이 있는가?

◆ 응천 스님
대한불교호국종 총무원장
호국승군단 초대 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