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혁명은 왕정을 무너뜨렸지만 권위에 대한 문화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1789년 7월14일 프랑스 시민들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고 있다. 장 피에르 우엘 작품
정치에서 반복되는 착시는 선거에서 이기거나 정권을 잡으면 모든 것이 바뀐다는 믿음이다. 그러나 지난 수십 년의 경험은 그렇지 않음을 보여준다.
정권은 바뀌어도 학교 교육, 미디어, 일상 언어와 상식은 쉽게 변하지 않았다. 이유는 국가는 장악할 수 있어도 사회는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국가는 점령해도 사회는 남는다
안토니오 그람시는 권력을 법과 군대만으로 이해하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이 특정 질서를 왜 “원래 그런 것”으로 받아들이는지 주목했다.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기존 질서를 재생산하는 상태를 그는 ‘헤게모니’라고 불렀다. 강제가 아니라 사회적 동의가 지배를 유지하는 힘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오랫동안 선거와 정책, 정권 교체에 집중했지만 교육과 문화, 언어의 문제는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루었다. 그 결과 정권은 바뀌어도 교실과 문화는 그대로 남았다. 국회는 달라졌지만 사회적 상식은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막스 베버는 ‘국가’를 정당한 물리적 강제력을 독점한 조직으로 정의했다. 그러나 국가는 사람들의 사고와 감정까지 직접 통제하지는 못한다. 그 영역은 사회에 남는다. 사회는 법보다 관습과 반복에 의해 움직이며, 학교·가정·미디어가 함께 상식을 만들어 낸다.
그람시는 정치권력보다 문화의 지속성을 더 중요하게 보았다. 정권은 바뀔 수 있지만 문화는 세대를 거쳐 축적된다. 그래서 ‘기동전’인 선거와 정책만으로는 한계가 있으며, 교육과 문화, 언어를 바꾸는 ‘진지전’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국가는 점령해도 사회는 남는다. 이 말은 전략을 바꾸라는 요구다. 사회를 설명하는 언어와 문화적 기반을 먼저 축적해야 정치적 성과도 오래 유지될 수 있다. 진정한 승부는 국가보다 사회에서 결정된다.
혁명은 성공해도 문화는 저항한다
혁명이나 정권 교체가 성공하면 사회 전체도 함께 변할 것이라는 기대는 역사에서 반복해서 빗나갔다. 제도는 바뀌어도 사고방식은 그대로이고, 권력자는 교체되어도 세계관은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그람시는 이를 정치와 문화의 속도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정치는 빠르게 움직인다. 정부와 법률, 행정은 단기간에 바뀔 수 있다. 그러나 문화는 학교, 가정, 언어, 관습 속에서 오랜 시간 축적되므로 쉽게 변하지 않는다. 혁명 이후 가장 먼저 나타나는 현상은 문화의 저항이다.
프랑스혁명은 왕정을 무너뜨렸지만 권위에 대한 문화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러시아혁명 역시 새로운 체제가 들어섰지만 국가 중심적 사고는 계속 유지됐다. 새로운 제도도 결국 기존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그람시는 문화를 정치의 결과가 아니라 정치를 떠받치는 토대로 보았다. 문화가 바뀌지 않으면 제도 역시 시간이 지나면서 기존 방식으로 흡수될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혁명 이후보다 혁명 이전의 문화 작업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문화는 거리에서 저항하지 않는다. 교과서, 드라마, 뉴스, 일상 언어를 통해 기존 세계관을 조용히 유지한다. 그래서 더욱 강력하다. 국가는 명령하지만 문화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당연하게 만든다.
우리는 정치를 과대평가하고 문화를 과소평가해 왔다. 자유와 책임을 설명했지만 문화의 언어로 전달하지 못했다. 설명만으로는 상식을 바꾸기 어렵다.
혁명은 성공해도 문화는 저항한다는 말은 체념이 아니라 전략이다. 정치 이전에 문화를 준비해야 한다는 뜻이다. 정치의 속도가 아니라 문화의 속도로 접근할 때 비로소 변화는 지속될 수 있다.
진지는 전선 뒤에 있다
정치에서 가장 큰 착각은 싸움의 장소를 잘못 보는 것이다. 우리는 선거와 정권 교체 같은 전선만 바라본다. 그러나 실제 승부는 그보다 앞선 곳에서 이미 결정된다. 그람시는 그 공간을 진지라고 불렀다.
전선은 눈에 잘 보이지만 진지는 학교, 교과서, 언론, 드라마, 일상 언어 속에 숨어 있다. 전선은 결과가 나타나는 곳이고, 진지는 결과를 만들어 내는 곳이다. 진지를 잃으면 전선에서 이겨도 결국 다시 밀리게 된다.
그람시는 기동전과 진지전을 구분했다. 기동전은 선거와 혁명처럼 빠른 권력 획득이고, 진지전은 상식과 가치관을 천천히 바꾸는 과정이다. 시민사회가 발달한 사회일수록 진지전이 더 중요하다고 보았다.
국가는 법과 제도를 바꿀 수 있지만 사회는 설득과 학습을 통해서만 움직인다. 사람들의 판단 기준이 바뀌지 않으면 새로운 정책도 오래 유지되지 않는다.
진지는 교과서, 언론, 문화산업, 학계가 서로 연결되면서 형성된다. 대학에서 나온 개념이 출판과 교육, 미디어를 거쳐 사회적 상식으로 자리 잡는다. 이 연결망이 헤게모니를 만든다.
우리는 자유와 책임의 가치를 말해 왔지만 이를 문화적으로 축적하는 데는 충분한 노력을 기울이지 못했다. 그래서 정책을 설명하는 순간 이미 불리한 조건에서 싸우게 되었다.
진지는 전선 뒤에 있다. 이 말은 정치보다 문화를 먼저 준비해야 한다는 뜻이다. 교육과 언어, 문화 속에서 상식을 축적할 때 전선의 승리도 지속될 수 있다. 결국 장기적인 승부는 눈에 보이는 전선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진지에서 결정된다.
※ 더 자세한 내용이 궁금하다면 松山 정광제의 신작 ‘자유주의자의 그람시 읽기’를 추천합니다.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200415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