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상이 아닌 도박. 국민의 미래를 룰렛판에 걸 수는 없다. 한미일보 그래픽
“미국이 한국에 3,500억 달러 현금 출자를 요구했다.”
국내 언론에 퍼진 이 문장은 사실처럼 소비되지만, 팩트체크를 해보면 근거가 취약하다.
러트닉 미국 상무장관은 CNBC 인터뷰에서 일본의 5,500억 달러 투자와 관련해 “자금은 그들(일본)이 알아서 할 일”이라고 분명히 말했다.
이는 미국이 자금 조달 방식에 개입하지 않고, 일본이 현금이든 융자든 보증이든 스스로 마련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중요한 개념이 바로 ‘캐피털 콜(capital call)’이다.
일본은 미국과의 협정을 통해 “총 얼마까지 투자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실제 납입은 프로젝트가 실행될 때마다 단계적으로 이뤄진다. 미국이 특정 산업 프로젝트를 제안하면 일본은 그때그때 필요한 금액을 집행한다. 납입 방식은 일본이 정한다.
결국 돈을 어떻게 마련할지는 일본 책임이고, 미국은 프로젝트 선정과 집행이라는 권한을 쥔다.
상식적으로 같은 구조가 한국에도 적용될 수밖에 없다. 미국이 일본에는 “자금은 네가 알아서 해라”라고 하면서, 한국에만 유독 “현금 출자”를 강제한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이런 주장이 한국 언론을 통해 확산됐다. 로이터 통신 보도 역시 한국 언론발 기사를 인용한 것이며, 출처는 대부분 “한국의 관계자”라는 애매한 표현에 불과하다. 미국은 한국에 현금 출자를 요구한다는 사실을 공식 확인한 적이 없고, 한국 정부 또한 “현금 출자만을 요구받은 것은 아니다”라고 선을 긋고 있다.
여기서 더 주목할 대목은 정부의 태도다.
한미일보는 이미 허드슨연구소 보고서를 통해 미·일 무역협정 양해각서 내용을 최초로 보도했다. 그러나 이재명 대통령은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그런 내용을 모른다”고 답했다.
사실이라면 외교·통상 현안에 대한 보고 체계에 중대한 문제가 있다는 뜻이고, 만약 내용을 알고도 모른다고 했다면 국민에게 충분히 납득되지 않는 대응이다. 어느 쪽이든 국정 운영의 신뢰를 해치는 발언이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뒤이어 등장한 “무제한 통화스와프 요구” 보도도 같은 맥락이다.
한국 정부 당국자의 애매한 워딩이 언론을 통해 확대 재생산됐고, 미국의 반응은 사실상 “이건 뭐야?”라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국내 언론은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했고, 학자나 관계자들까지 언론 보도를 근거로 억측을 쏟아내며 여론을 키웠다.
결국 지금 한국 사회가 믿고 있는 그림은 “미국이 엄청난 요구를 하고, 이재명 정권이 힘겹게 협상 중이다”라는 서사다.
하지만 차분히 상식을 들이대면 이는 사실과 다르다. 미국 입장에서 중요한 것은 ‘현금이냐 보증이냐’가 아니라, 투자 자체가 미국 땅에 들어와 산업과 일자리를 창출한다는 사실이다. 손익보다 투자 결정을 이끌어냈다는 정치적 성과가 본질이다.
그렇다면 한국에만 왜 이런 혼란술이 작동하는가를 살펴보자.
첫째는 시간을 벌기 위해서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트럼프 대통령이 부과한 관세는 현재 연방대법원에서 심리 중인데, 패소할 가능성이 높다는 게 미국 법조계의 시각이다. 판결은 올해 말에 나올 수도 있고, 늦으면 내년 상반기까지 갈 수도 있다. 그 전에 한국이 협정서에 서명하면, 트럼프가 법정에서 지더라도 협정은 유효하다. 조급한 쪽은 트럼프다. 현 정부가 버티면 일본보다 나은 조건을 받아낼 수 있다는 계산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트럼프가 대법원에서 지더라도 그가 한국에 쓸 수 있는 카드가 많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된다. 여기에 배팅을 하는 건 협상이 아니라 도박에 가깝다.
둘째는 국내 여론몰이다.
반미 여론을 키워 반(反)이재명 세력의 힘을 분산시키려는 정치적 동기가 깔려 있다. 실제로 일부 여론은 이미 움직이고 있다. 그러나 이는 양날의 검이다. 국내에서 반미 정서가 과도하게 커지면 트럼프 행정부에도 부담으로 작용한다. 하지만 협상 과정이 드러난다면 이재명 정권은 치명타를 입을 수 있다. 어쩌면 미국은 타이밍을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재명 정권은 지금 정권을 지키려는 과정에서 특검·특별재판부·야당 당원명부 압수 등 논란이 큰 조치들을 이어가고 있다. 그러나 미국이 이 정권의 노림수를 모를 리 없다. 정치적 계략으로 언론을 흔들고 여론을 왜곡하는 일은 일시적으로 통할 수 있지만, 국제사회에서는 결국 사실이 드러난다.
지금 필요한 것은 호들갑이 아니라 상식이다.
‘현금 출자 요구’와 ‘무제한 스와프’ 논란은 사실이 아닌 정치적 프레임이다. 국민이 여기에 휘둘리면 국익은 물론 민주주의의 근간까지 흔들린다. 정신줄을 잡아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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