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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우 칼럼] 망해가는 조선, 대한민국 사법과 언론을 비웃다
  • 이신우 前 문화일보 논설고문
  • 등록 2026-03-29 15:0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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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4월 7일은 ‘신문의 날’이다. 신문은 이날 사설 등을 통해 새로운 각오를 다짐하고는 한다. 필자는 최근 벗의 초청으로 경남 산청군 생초면을 두루 둘러볼 기회를 가졌다. 보는 내내, 그곳에서 120여 년 전 벌어진 한 사건이 이 나라 사법과 언론의 처참한 현실을 고발하고 있다는 상념이 떠나질 않았다.


정의의 여신상. [게티 이미지=구글 AI 합성] 

1902년(대한제국 광무 6년), 경상도 산청군 압동(현 생초면 어서리) 마을에서 김조이라는 이름의 여인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범인은 남편이었다. 


남편 권원중은 평소 생업을 소홀히 한 채 노름에 빠져 있었으며, 사건 당시 그는 노름빚 때문에 왈패들로부터 쫓기는 처지였다. 이전에도 몇 번 그랬듯 권원중은 김조이에게 친정에서 돈 좀 마련해 오라고 졸라댔다. 김조이는 “벼룩이도 낮짝이 있다”며 더 이상 손을 내밀지 못하겠다고 거절했다. 권원중은 말이 통하지 않자 마침내 주먹과 몽둥이를 휘둘렀다. 그 폭력이 과했다. 김조이가 쓰러진 채 숨을 거뒀다.


후일 검시 과정에서 나온 증언들에 따르면 당황한 권원중과 시어머니는 시체를 헛간으로 끌고 가 대들보에 목매 자살한 것처럼 위장했다. 그 후 사체를 안방으로 옮겨와 눕히고, 죽은 몸을 수습한 것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권원중은 즉각 도피했다.


사망 사건을 접수한 산청군 군수는 1차 검시(초검)를 실시, 자살 사건으로 검안서를 작성했다. 초검 결과가 나오자 이를 재확인하기 위한 2차 검시(복검)가 인근 단성현감에 의해 시행됐고, 여기에서도 자살 사건으로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김조이의 부친은 딸이 남편의 폭행으로 사망한 것이 분명하다며 경상관찰사가 있는 대구 감영에 항소했다. 산청군과 단성현이 토호 세력인 권씨 가문의 눈치를 보는 바람에 시신에 나타난 뚜렷한 상흔에도 불구하고 자살로 처리했다는 항변 이유였다.


대구 감영은 유족의 이의 제기에 따라 삼검을 실시했다. 이번에는 합천군수가 산청군으로 파견됐다. 군수 이병의는 시신의 구타 흔적과 위장 자살의 정황을 밝혀내며 타살로 결론을 뒤집었다. 그는 단순히 시신 관찰에만 머물지 않았다. 처음부터 의심스러운 주변 상황과 주변 인물들의 증언이 불일치한다는 점을 예리하게 파고든 것이다.


이번에는 마을을 지배하고 있는 권 씨 일족이 강하게 반발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마을 주민의 증언 내용들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결국 4차와 5차 검시가 반복됐고 권 씨 가문의 조직적인 증언 방해와 뇌물 살포로 인해 ‘자살’ 혹은 ‘사인 불명’으로 번복되는 파행이 이어졌다. 


김조이의 부친도 굴복하지 않았다. 유족의 끈질긴 상언(上言)으로 사건은 결국 대한제국 최고재판소인 평리원으로 이송됐다. 법부(法部)는 다시금 정밀한 재조사를 명령했다. 이번에는 법부 관리가 특별 수사관으로 파견됐다.


수사관들이 6차로 정밀 재조사를 벌였고, 권 씨 집안 사비와 인근 주민의 자백 번복 등 결정적인 증언을 바탕으로 시신의 흔적들을 재해석해 냈다. 1904년, 최고재판부는 마침내 “남편 권원중이 아내 김조이를 구타하여 살해한 후 자살로 위장했다”고 결론을 내렸다. 주범인 남편 권원중은 사형(교형)에 처해졌고, 시신 유기를 돕거나 거짓 증언을 했던 공범들은 유배 및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지금으로부터 120여 년 전, 조선이 처참히 무너지던 시점에 벌어진 이 끈질긴 심리 과정은 오늘날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당시 조선의 수사관이요, 판관들은 비록 나라야 바람 앞에 촛불처럼 위태로웠을망정 ‘사실’과 ‘물증’ 앞에서 최소한의 정직함을 지키려 분투했다. 


조선은 관리자들이 철저히 부패했을망정, 앞서 보듯 그 시스템을 지탱하는 ‘법전(경국대전 등)’과 ‘수사 매뉴얼(무원록·無寃錄)’의 권위는 마지막까지 살아 숨쉬고 있었다. 6차례나 수사와 심의가 번복되는 과정 자체가 역설적으로 ‘원통함이 없게 하라(無寃)’는 통치 원칙과 법치 시스템의 의지를 웅변해주는 것이다.


그럼 현 대한민국은 어떤 모습인가. 불행히도 이념적 잣대나 정치적 이해관계에 매몰되어 ‘결론을 정해놓고 증거를 끼워 맞추는’ 식의 작태가 만연 중이다. 더욱 비극적인 것은 사법부 종사자나 언론인들 중 많은 이들이 이런 추태에 둔감하고 심지어 부끄럼움조차 느끼지 못한다는 점이다. 


김조이 살인 사건의 심리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역사의 진보는 결코 선형적으로 진행되지 않는다는 서글픈 역설을 목격하게 된다. 대한제국 사법 관리들이 보여준 집요한 실체적 진실 추구는, 고도의 사법 시스템을 갖췄다는 현대 한국의 법정이 정쟁과 이념의 도구로 변질, 추락해 버린 현실을 매섭게 질타하는 듯하다.


정의는 기술의 발전과 함께 오는 것이 아니라, 권력의 압박 속에서도 ‘아닌 것은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법관, 혹은 그 시스템의 정직함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이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철저히 외면당하고 있다.


윤석열 전 대통령에 대한 내란 재판이나 부정선거 소송 등 민감한 정치적 사안에서 보여준 사법부의 행보는 법의 천평(天秤)이 흉하게 찌그러져 있음을 보여준다. 오늘날의 이념 편향적 재판은 ‘진실’을 찾는 과정이라기보다, 특정 정치 세력을 사회적으로 매장하거나, 혹은 찬탈자를 정당화하기 위한 요식 행위로 전락했다는 비판을 받아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대한제국이 김조이 사건에서 6차 검시까지 간 것은 시스템이 완벽해서가 아니라, ‘오판할 가능성’에 대한 겸허함이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 무오류의 독단에 빠져 있는 현대 한국의 사법부와 절묘한 대조를 이룬다. 


특정 이념에 경도된 판결이 ‘법치’라는 이름으로 포장될 때, 법은 정의를 수호하는 방패가 아니라 상대를 쓰러뜨리는 무서운 살상 무기로 변질된다. 공정 선거와 윤석열 전 대통령은 그렇게 무너졌다. 역설적이지 않은가. 망해가는 조선이 이렇듯 선진 한국의 사법 체계를 비웃고 있는 모습이. 


똑같이 비판받아야 할 대상이 이 나라의 레거시 언론이다. 이들은 지금 중세 법정의 마녀사냥 역사에서 보듯 “법정이 마녀라고 했으니 그 여자는 마녀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런 판단은 내가 내린 것이 아니다”라는 비굴한 자세로 일관하고 있다.


이것이 부정선거나 윤석열 전 대통령 재판에서 벌어지는 한국 사법부의 판결 행태와 이를 보도하는 레거시 언론의 진면목이다. 판결의 옳고 그름을 넘어, 제도적 권위가 진실을 독점할 때 발생하는 폭력성과 그 권위에 편승한 관찰자의 무책임이 한국 사회를 덮고 있는 먹구름의 실체인 것이다. 


중세 마녀재판의 가장 큰 비극은 ‘마녀’라는 전제를 세워두고, 그 전제에 맞춰 모든 증거와 정황을 짜맞추는 순환 논리에 있었다. 이 나라의 사법부가 특정 정치 세력이 가리키는 대로 ‘내란’이라는 결론을 향해 달려간다면, 재판 과정에서 제시된 법리적 근거들은 진실을 찾는 도구가 아니라 퇴기(退妓)가 주름진 얼굴에 바르는 싸구려 화장품과 무엇이 다른가.


언론이라고 다를 바 없다. 그들 역시 “법원이 내란이라고 판결했으니 내란이 맞다”거나 “법원이 선거 부정은 없었다고 판결했으니 선거 부정은 없다”라고 복창할 따름이다. “사법부가 그랬대요”라는 태도는 ‘실체적 진실의 추구’라는 언론의 존재 이유를 스스로 포기하는 행위다. 


서구 사회에서 마녀사냥이라는 범죄행위가 사라진 것은 재판관의 각성 때문이 아니다. “정말로 마녀가 존재하는가?”라는 근본적 질문을 던진 이성의 목소리(언론 포함)에서 역사의 진보가 시작된 것이다. 


대한한국 언론이 “법정이 마녀라 했으니 마녀다”라는 지적 수준에 머물러 있다면, 이는 사법부가 폭력 정치의 하수인이 되지 않도록 감시해야 할 언론이 빗나간 사법부를 정당화해 주는 꼴이나 마찬가지다. ‘신문의 날’이라면서 고작 싸구려 화장품 바겐세일이나 외쳐서야 되겠는가.


前 문화일보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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