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안은 공동이라 해도, 스위치를 누르는 손은 미국이었다. 한미일보 그래픽
10월 30일 한미 회담은 3500억 달러, 자동차 관세 15%, 연 200억 달러 상한이라는 인상적인 숫자를 남겼지만, 정작 ‘공동 팩트시트’는 발표되지 않았다. 표면적 타결과 달리 문서가 나오지 않는 이유는 숫자의 문제가 아니라 집행 지휘권과 워싱턴의 신뢰 판단에 있었다는 분석이 힘을 얻는다.
투자 합의의 실효성은 문안 자체보다 집행 레일의 설계에서 갈린다. 프로젝트 선정 기준, 마일스톤 설정, 분기별 집행 한도, 미달 시 회수 절차까지 세부적으로 확정돼야 문서는 실체를 갖는다. 그러나 국내 언론의 해석은 외신과 미국 측 보고서와는 결이 다르다. 외신들은 합의의 속도를 가른 핵심 요인을 ‘집행 통제권’과 ‘이재명 정권에 대한 낮은 신뢰’에서 찾았고, 한미일보는 이 관점을 토대로 지연의 배경을 다시 정리했다.
가장 큰 원인은 집행 거버넌스가 이미 미국 쪽으로 상당히 기울어 있다는 점이다.
일본과 체결된 MOU는 그 구조를 선명히 보여준다. 투자 대상은 미국 대통령이 최종 선정하고, 상무장관이 의장인 투자위원회가 심사·감독을 맡으며, U.S. Investment Accelerator가 집행과 문서화를 담당한다. 이 3단 구조는 미국이 자금의 방향과 속도를 사실상 단독으로 통제하는 체계이며, 워싱턴이 한국에도 동일한 틀을 적용하려는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라는 평가다. 한국이 이 구조를 어느 정도까지 수용하느냐가 문안 타결의 관건이 되고 있다.
여기에 이재명 정권을 향한 워싱턴의 불신이 겹치면서 협상 속도는 더 느려졌다는 분석이 따른다.
서울의 메시지 일관성 부족, 시장 안정 장치 미흡, 통화·관세 관련 발언의 진폭은 미국에서 ‘카운터파티 리스크’로 인식됐다. 신뢰가 낮을수록 미국은 집행 지휘권 강화, 마일스톤 연동 확약, 자동 상한 설정, 클로백 조항 등 실질적 통제 장치를 더 강하게 요구한다. 한국이 ‘공동 발표’라는 형식적 균형을 강조하기 시작할수록 미국은 그 빈틈을 더 높은 수준의 실물 확약으로 채우려는 경향을 보였다. 협상 지연은 힘겨루기라기보다 신뢰 부족이라는 구조적 원인에 가깝다는 해석이 힘을 얻는다.
또 다른 난제는 관세 15% 확정 방식의 비대칭이다.
미국은 관세를 공동 발표문이 아니라 연방관보(Federal Register) 고시, USTR 지침, CBP 집행 문서로 확정하려 하고 있으며, 이는 효력일·적용 품목·예외 규정을 미국이 단독 조정할 수 있게 하는 방식이다. AP가 “아직 문서로 공식화된 것이 없다”고 지적한 것도 이 실행 경로가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동 문안을 발표하더라도 최종 스위치를 누르는 손은 미국이라는 점이 워싱턴의 일관된 선호다.
법·절차의 비대칭도 협상의 무게중심을 미국 쪽으로 기울게 한다.
관세는 미국의 일방 고시만으로 발효되지만 투자는 양국의 서명과 후속 행정 절차를 거쳐야 한다. 미국이 “실질 통제는 우리가, 표시는 공동으로”라는 방식을 선호하는 배경도 여기에 있다. 한국은 관세 확실성·연간 상한·시장 안정 장치를 교환하려 했지만 구조적 비대칭 자체가 쉽게 뒤집히지 않는 한계가 계속 드러났다.
이러한 흐름을 종합하면 형식은 ‘공동’이지만 실질 통제권은 미국에 귀속되는 구조가 유력하다. 그 대가로 미국은 조선·에너지·공급망·국내 고용·대중 수출통제 분야에서 수치화된 추가 확약을 요구할 가능성이 높으며, 일본 선례가 이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반복 활용될 전망이다.
결국 이번 협상을 관통한 핵심은 트럼프가 말한 ‘up front’의 의미가 ‘선불’이 아니라 ‘주도권’이었다는 점이다. 이 의미를 정확히 해석하지 못한 것이 협상 난항의 근본 원인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한국은 숫자보다 집행 통제 구조를 먼저 확정했어야 한다는 비판이 나온다. 남은 질문은 결국 이 한 가지로 귀결된다.
“숫자가 아니라, 스위치를 누르는 사람은 누구인가”
<참조 문서>
USTR 일본 MOU 브리핑 자료(2025), 미 상무부 Investment Accelerator 설명서, 백악관 NEC 브리핑, 연방관보 관세 절차 규정(Title 19), CBP Tariff Enforcement Manual, CRS 미·일 투자집행 보고서(2024), AP·Bloomberg 등 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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