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부가 외국인용 종이 입국신고서를 전자 입국신고서(K-ETA)로 대체하면서 대만인들이 한국 입국 시 대만인이라고 쓰지 못하고 중국이 요구하는 ‘중국(대만)’만 기재할 수 있도록 해 논란이 일고 있다. Unsplash
서상문 편집위원·환동해미래연구원장
최근 대만·중국 간의 오랜 다툼에 한국이 연루돼 외교적 파장이 일고 있다. 대만·중국이 원인 제공자이지만 계기를 만든 것은 한국이다.
한국 정부가 외국인용 종이 입국신고서를 전자 입국신고서(K-ETA)로 대체하면서 대만인들이 한국 입국 시 대만인이라고 쓰지 못하고 중국이 요구하는 ‘중국(대만)’만 기재할 수 있도록 해 놨기 때문이다.
기존에는 대만인이 한국 입국 시 직접 손으로 자신의 국적을 ‘대만(臺灣)’ 또는 ‘Taiwan’으로 기재할 수 있었다.
그런데 2025년 2월부터 도입된 새로운 전자 입국신고서에선 드롭다운 메뉴에서 대만 여행객의 ‘출발지 및 목적지 국가’를 ‘중국(대만)’이나 영어로 ‘China(Taiwan)’으로 표기하도록 변경돼 있다.
입국자의 개인신상 정보를 입력하는 ‘국적(Nationality)’ 항목에선 여전히 ‘대만(Taiwan)’을 선택할 수 있지만 ‘출발지’와 ‘다음 목적지’ 항목에선 대만인은 자연스레 ‘중국(대만)’ 국적자가 된다. 그래서 대만이 뒤늦게 이달 초에 정식으로 한국 정부에 항의한 것이다.
대만 외교부가 “사실과 부합하지 않으며, 대만이 중국에 종속된 것과 같은 인상을 준다”며 즉각적인 시정을 요구한 것이다. 대만 독립 성향이 강한 라이칭더(賴淸德) 대만 총통까지 직접 나서 “한국이 대만 국민의 의지를 존중해 주길 바란다”고 언급했다.
총통의 발언으로 사태의 심각성이 더해졌다. 대만 내에선 한국과의 관계를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는 강경한 목소리까지 터져 나왔다.
대만 측이 이처럼 강하게 반발하는 이유가 있다. 이 표기로 인해 중국이 주장하는 ‘하나의 중국’ 원칙을 한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으로 비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하기 때문일 것이다.
또 미국·일본·유럽연합(EU) 등 주요국들은 입국 서류에 ‘대만’ 표기를 허용하고 있는데 왜 유독 한국만 중국의 입장을 인정해 주는가 하는 불만도 있다.
한국 정부는 곤혹스러워하고 있다. 외교부는 “대만과의 비공식적 실질 협력관계를 증진해 나간다는 기본 입장에 변함이 없다”면서도 표기 변경은 선뜻 하지 않고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여기에는 몇 가지 복합적인 이유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첫째, 1992년 8월 한국이 한·중 수교 당시 중국과 ‘하나의 중국’ 원칙을 존중하기로 한 외교적 합의를 깨뜨리기 어렵기 때문이다. 대만 문제를 자국의 핵심 이익에 관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중국은 어떤 형태로든 대만 독립을 인정하려는 시도에 대해선 극도로 민감하게 반응해 왔다.
한국으로선 여러 가지 이유로 중국과의 관계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 외교부는 이번 사안에 대해 “문제 될 것이 없다”는 입장을 내비치며 한국의 현행 조치를 사실상 지지했다.
둘째, 행정의 일관성 문제다. 한국 외교부는 90일 이상 장기 체류하는 외국인에게 발급하는 외국인등록증에 이미 2004년부터 ‘중국(대만)’ 표기를 사용해 왔다는 점을 근거로 변경에 대해 난색을 드러내고 있다.
지난 20여 년간 큰 문제 없이 유지되어 온 관행을 이제 와서 변경할 경우 다른 행정 시스템에도 연쇄적인 파장을 일으킬 수 있다고 우려하는 것이다.
셋째, 단순한 행정 절차의 디지털 전환 문제를 넘어 ‘하나의 중국’ 원칙과 대만의 정체성 문제가 정면으로 충돌하는 민감한 사안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어느 정부가 들어서더라도 쉽게 해결하기 어려운 외교적 난제다. 전자 입국신고서 시스템이 도입된 것은 현 이재명 정권 출범 이전이기 때문에 이 문제를 특정 정부의 ‘친중’ 성향 때문이라고 매도할 건 아니다.
이 문제는 한·중 수교 시 노태우정부가 ‘하나의 중국’ 원칙을 덥석 인정해 주는 등 중국의 페이스에 밀리면서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서 생긴 역사의 업보라 볼 수 있다.
세기가 바뀐 지금도 한국은 대만 국적 표기 문제가 한·중 수교 당시 한국 정부가 선택했던 전략적 결정의 연장선에서 자승자박의 꼴로 묶여 있는 셈이다.
당시 노태우정부(외무부 장관 이상옥)는 ‘하나의 중국’ 원칙을 인정하면서 중국과 수교하게 돼 중국 시장이라는 큰 실리를 얻었다.
동시에 우리가 대응하기에 따라선 ‘하나의 중국’ 옵션 문제를 슬기롭게 피해 갈 수 있었음에도 조급하고 미숙하게 중국과 수교함으로써 그 후과로 대만과의 외교 관계에서 스스로 제약을 받게 된 것이다. 이는 과거나 지금이나 여야를 떠나 그만큼 한국 정부는 중국을 잘 모른다는 방증이다.
중국을 제대로 모르고 서둘러 수교를 맺었다고 하는 증좌들을 이 지면에서 모두 열거할 수 없어 한두 가지만 제시한다.
당시는 한국뿐만 아니라 중국도 한국과의 수교를 원했지만 일절 내색하지 않고 느긋한 태도를 보였는데, 한국 정부는 이를 간파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수교 협상 당시 우리가 우위에 설 수 있었던 중국의 6·25전쟁 ‘불법 개입’에 대한 사과 문제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사과를 받아내기는커녕 한국 측은 중국의 6·25전쟁 불법 개입으로 우리 국민이 입은 엄청난 피해와 희생은 물론, 한반도 통일까지 저지당한 사실을 인정하고 사죄하게 하지 못했다. 단지 중국 정부가 다시는 있어선 안 될 “불행하고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언급하는 선에서 끝냈을 뿐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한국 정부는 대만이라는 카드를 중국에 대해 ‘하나의 한국’을 인정하게 만들 외교적 명분으로도 전혀 활용하지 못했다. 당시는 대만이나 중국이 모두 ‘하나의 중국’ 원칙을 고수했는데, 한국 정부는 한반도 통일 원칙을 내세워 활용하지 못했다.
게다가 중국·대만이 모두 ‘하나의 중국’을 표방하고 있는 점을 이용해서 우리도 중국에 대해 ‘하나의 중국’이란 원칙은 인정하는 것을 전제로, 그 하나의 중국이 둘 중 어느 쪽이냐에 대해선 중국과 대만이 각각 알아서 하라고 주장했어야 한다.
이는 대만과 중국이 공히 ‘하나의 중국’을 표방하면서도 ‘하나의 중국’에 대한 각각의 입장을 각자가 구두로 표명하기로 한 ‘92공식(九二共識)’과 유사한 형식이다.
그래서 끝까지 ‘밀당’을 해서 최소한 중국이 우리에게 하나의 중국만을 인정하게 했듯이 우리도 중국에 대해 ‘하나의 한국’만을 인정하도록 해야 했다.
하지만 이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과거지사다. 지금 이런 상황에서 한국 정부는 크게 다음 세 가지 방안을 검토할 가능성이 커 보인다.
첫째, 중국 측 입장을 그대로 따라 주는 것. 둘째, 대만의 입장을 그대로 인정해서 ‘대만(타이완)’을 표기해 주는 것. 셋째, 이번 사태를 기회로 아예 대만을 ‘중화민국’으로 표기하는 방법이다.
한국 정부는 첫째 방안으로 갈 가능성이 거의 100%에 가깝고, 세 번째 방법은 100%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
이 세 가지 방안은 모두 중국과 대만을 다 같이 만족시킬 수 없다. 따라서 다른 대안을 제시해서 대만과 중국이 모두 만족하거나 최소한 더 이상 계속 자기들의 기존 입장을 주장할 수 없게 해야 한다.
필자는 대안으로 ‘Chinese Taipei’를 제안한다. 대만이 올림픽을 비롯한 각종 국제기구 및 행사에서 중국과의 정치적 마찰을 피하기 위해 사용하는 중립적인 명칭인 ‘Chinese Taipei’는 중국과 대만 양측 모두 100%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최악의 상황을 피하기 위한 ‘차선책’으로 수용해 온 역사가 있다.
과거 1991년 11월 한국 정부의 지원을 받은 대만이 이 명칭으로 중국·홍콩과 함께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에 가입한 바 있다. 그로부터 국제사회에서는 이 용어를 사용해 오고 있다. 대만이 올림픽이나 국제회의에 참여할 때는 이 명칭으로 참여한다.
지난 10월에도 경주 APEC 정상회의에서 한국 정부가 대만을 ‘Chinese Taipei’로 표기했고 대만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중국 입장에선 ‘Chinese’라는 표현을 통해 ‘하나의 중국’ 원칙을 상징적으로 유지할 수 있고, 대만 측에선 대만이 ‘중국’의 일부로 귀속되는 것을 피하면서 국제사회에 참여할 통로를 확보할 수 있다.
따라서 한국 정부가 이 국호를 입국신고서에 도입한다면, 대만해협 양안(兩岸) 모두에게 더 이상 강경한 주장을 펼치지 못하도록 설득할 수 있는 명분이 될 수 있다. 중국과 대만이 모두 불만족스러워 하긴 해도 끝까지 자신들의 기존 주장을 고집하진 못할 것이다.
현 대만 집권당인 민진당이 독립 성향이 강하다고 해도 이 문제에 대해선 끝까지 ‘대만’이란 호칭을 고집하지 못하고 어느 시점에 가선 받아들일 것이다. 중국 역시 더 이상 기존 ‘중국(대만)’이라는 입장을 끝까지 관철하려 하진 않을 것이다.
물론 이 해법 역시 완벽하지는 않다. ‘Chinese Taipei’는 국제회의나 스포츠 행사 등 특수한 목적을 위한 타협의 산물일 뿐, 국가 주권과 관련된 출입국 관리시스템에 이를 그대로 적용하는 것이 적절한가 하는 논란이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국적 표기 자체는 ‘대만’으로 선택 가능하게 열어 두되, 문제가 된 ‘출발지/목적지’ 표기에 대해선 기술적인 해법을 모색하는 것도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Chinese Taipei’를 가지고 원칙적으로 문제를 풀어야 한다.
문제는 친중 사대적인 이재명 정권의 대(對)중국 저자세다. 이번에도 중국의 눈치를 보면서 비위를 맞춰 온 기존 행태의 연장선에서 바꾼 명칭을 그대로 밀고 나갈 가능성이 커 보인다. 그래선 화를 자초하게 될 것이다.
현명하지 못하게 대처했다가 더 큰 화를 초래하는 어리석음은 피해야 한다. 대만과 한국 두 나라 국민의 감정을 상하게 하고, 대만과의 반도체 공급망 협력과 연간 수백만 명에 달하는 인적 교류 등 실질적인 관계에까지 악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대만 측은 현재 한국과의 무역적자 문제까지 거론하며 압박 수위를 높이고 있다. 물론 이것은 효과에 한계가 있지만, 그것과 별개로 가까운 미래에 닥칠 동아시아 국제정세의 변화를 내다볼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국가 전략적 고려 항목에 넣고 대만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관리할 필요가 있다.
이 문제를 조기에 해결하지 못하고 방치한다면 미·중 경쟁이 심화되고 동아시아의 지정학적 긴장이 고조되는 거시적인 흐름 속에서 사태가 더욱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될 것이다. 원칙을 지키면서도 실리를 놓치지 않는 현명하고 실용적인 외교가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점이다.
한미일보 편집위원·환동해미래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