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파 시인 고은과 그의 시. [사진=SBS뉴스(2016.12.28.)] 좌파 시인의 시를 읽다 보면 이상할 정도로 비슷한 느낌을 받는다.
시인도 다르고, 배경도 다르며, 시대도 다른데 읽고 난 뒤 남는 감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가슴이 무겁고, 분노가 남고, 뭔가 미안한 기분이 들고, 외면하면 안 될 것 같은 압박이 따라온다. 좌파 시에는 일정한 감정 운용 방식이 있다는 뜻이다.
좌파 시의 핵심 감정 ‘분노’ ‘연민’ ‘죄책감’
좌파 시에서 감정은 개인의 일상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오늘 아침의 햇빛이나, 사소한 사랑이나, 개인적 기쁨이 출발점이 되는 경우는 드물다.
대신 처음부터 사회가 등장한다. 체제, 국가, 권력, 자본, 역사 같은 크고 무거운 대상이 먼저 깔린다. 그리고 그 아래에 상처 입은 사람이 놓인다. 그들의 시는 언제나 이 구도로 시작한다.
이때 시 속 인물은 개인이지만 동시에 상징이다. 그는 특정한 얼굴을 가진 사람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억눌린 존재’라는 하나의 틀로 제시된다.
이 인물은 잘못이 없다. 어리석지 않고, 비겁하지 않으며, 일련의 책임에서 자유롭다. 고통은 언제나 외부에서 주어진다. 이렇게 설정해야 분노의 방향이 흔들리지 않는다.
좌파 시의 첫 번째 핵심 감정은 분노다. 다만 이 분노는 폭발하지 않는다. 고함치지 않고, 욕설을 쏟아내지도 않는다. 대신 낮은 톤으로 오래 지속된다. 울분에 가까운 침잠한 분노다.
이 방식은 꽤 효과적이다. 독자는 공격받는 느낌보다 함께 아파하는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 가슴의 방어선을 내려놓는다.
분노 다음에는 연민이 들어온다. 좌파 시에서 연민은 매우 중요하다. 연민의 대상은 대체로 가난한 사람, 배제된 사람, 패배한 사람, 기억되지 못한 사람이다.
이들은 구체적인 삶을 가진 인간이라기보다 도덕적 표식에 가깝다. 불쌍해야 하고, 보호받아야 하며, 의심받아서는 안 된다.
연민이 충분히 쌓이면 독자의 마음속에 다른 감정이 생긴다. 죄책감이다. “나는 저 고통에 대해 무엇을 했는가”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시는 직접 묻지 않는다. 대신 감정의 흐름으로 독자를 그 자리에 데려다 놓는다. 읽고 나면 괜히 편안하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남는다.
이 지점에서 좌파 시는 독자를 가만히 놓아두지 않는다. 행동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요구하는 것은 행동이 아니다. 태도다.
더 아파하라, 더 민감해져라, 더 분노하라는 요구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말하지 않지만, 무엇을 느껴야 하는지는 분명히 제시한다.
좌파 시에서는 감정이 곧 도덕
그래서 좌파 시에서는 감정이 곧 도덕이 된다. 제대로 분노하지 않으면 무감각한 사람이 되고, 연민하지 않으면 차가운 사람이 되며, 죄책감을 느끼지 않으면 부도덕한 사람이 된다.
시를 읽고도 마음이 크게 흔들리지 않으면, 독자는 스스로를 점검하게 된다. 시가 예술이라기보다 도덕적 기준표처럼 작동한다.
역사를 다루는 방식에서도 이 감정 구조는 그대로 반복된다. 좌파 시에서 과거는 분석의 대상이 아니다. 사실관계나 복잡한 사정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억울함과 상처다. 과거의 사건은 애도의 형태로 호출된다. 그 애도는 끝나지 않는다. 상처는 늘 현재형으로 유지된다.
이렇게 감정이 계속 유지되면 공동체가 만들어진다. 같은 시를 읽고 같은 감정을 느낀 사람들끼리는 자연스럽게 같은 편이 된다.
우리는 기억하는 사람들, 우리는 분노하는 사람들, 우리는 아파하는 사람들이라는 정체성이 생긴다. 이 감정 공동체는 매우 단단하다. 논쟁으로 깨지지 않는다. 감정은 설명보다 늘 강하다.
좌파 시인 개인의 이력도 이 구조를 강화한다. 투옥, 감시, 배제, 좌절 같은 경험은 시인의 도덕적 자산이 된다. 고통의 경험은 단어의 무게를 만든다.
그래서 좌파 시단에서는 작품보다 삶의 이력이 먼저 언급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얼마나 아팠는지가 얼마나 말할 자격이 있는지로 이어진다.
이 감정 구조가 오랫동안 반복되면서 한 가지 문제가 생기고 익숙해진다. 시는 새로운 언어를 쓰지만, 감정의 흐름은 늘 같다.
독자는 처음엔 흔들리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예측한다. 분노가 올 것을 알고, 연민이 이어질 것을 알고, 죄책감으로 마무리될 것을 안다. 놀라움이 사라진다.
그럼에도 좌파 시는 계속 영향력을 가진다. 감정은 설명보다 빠르고, 논리보다 직접적이다. 사람을 움직이는 힘은 언제나 감정에서 나온다. 좌파 시는 그 점을 오래전부터 정확히 활용해 왔다.
이 감정 구조를 이해하면 좌파 시를 굳이 존중할 이유가 사라진다. 감정이 이렇게까지 설계돼 있고, 독자의 반응을 특정 방향으로 유도하도록 반복된다면 그것은 시가 아니라 선전물에 가깝다.
좌파 시는 독자에게 생각할 여지를 주지 않는다. 분노와 연민, 죄책감의 순서를 미리 정해 놓고 그 길만 따라오라고 요구한다. 이 지점에서 시는 예술이 아니라 도덕 훈계가 된다.
문제는 이 방식이 수십 년째 반복된다는 점이다. 시적 언어만 바뀌었을 뿐 감정의 골격은 그대로다. 새로움도 없고, 인간 내면의 복잡함도 없다.
감정으로 현실을 덮고, 상징으로 인간을 단순화한다. 감정을 통해 세계를 넓히는 대신, 감정으로 세계를 가두는 글은 문학이라 부르기 어렵다. 그래서 오늘날 좌파 시는 위험하지도, 깊지도 않다. 다만 진부하고, 정서에 기생하는 폐기물에 가까울 뿐이다.

◆ 松山
시인이자 역사·철학 연구자. 이승만학당 이사를 역임했으며 현재 한국근현대사연구회 연구 고문, 철학 포럼 리케이온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시집 네 권을 출간했고 ‘후크고지의 영웅’을 공동 번역했다. 松山은 필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