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10월28일 건국대학교 사건. NL 계열 학생들이 반외세 자주화, 반독재 민주화, 조국 통일의 3대 구호를 내걸고 건대에서 점거 농성을 벌인 사건이다.
1980년대 학생운동은 하나의 흐름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1980년 5월 광주 이후 대학가는 이전보다 훨씬 급진적인 이념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학생운동의 관심은 권위주의 정권에 대한 반대에 머물지 않았다. 대한민국 사회를 어떤 체제로 볼 것인가, 미국과 한국의 관계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노동계급과 민족 문제 가운데 무엇을 우선할 것인가가 중요한 논쟁거리로 떠올랐다.
서울대·고려대·연세대·성균관대·서강대 등 주요 대학의 학회와 비공개 독서 모임에서는 △마르크스주의 △종속이론 △민중론 △제3세계 혁명론 △사회주의 혁명론이 집중적으로 읽혔다. 학생운동은 거리 시위 조직을 넘어 하나의 이념 교육 체계로 변해 갔다.
이 흐름은 1986년 전후의 사회구성체 논쟁으로 이어졌다. 쟁점은 한국 사회의 성격이었다. 한국을 이미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전한 사회로 볼 것인가, 아니면 미국에 종속된 식민지적 사회로 볼 것인가에 따라 운동 전략은 완전히 달라졌다.
전자의 입장에서는 노동계급 중심의 사회주의 변혁이 핵심 과제가 되었고, 후자의 입장에서는 반미·자주·통일을 앞세운 민족해방이 우선 과제가 되었다. 여기에서 훗날 NL과 PD로 불리는 두 노선의 이론적 토대가 형성되었다.
NL, 곧 민족해방 노선은 한국 사회의 핵심 모순을 민족모순으로 보았다. 이들은 분단 체제와 주한미군, 미국의 영향력을 가장 중요한 문제로 규정하였다. 따라서 반미·자주·통일이 운동의 중심 구호가 되었다.
반면 PD, 곧 민중민주 노선은 한국 사회를 자본주의 사회로 파악하고 계급모순을 핵심 문제로 보았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노동계급의 조직화와 사회주의적 변혁이었다. 노동조합, 노동현장, 산업민주주의, 계급투쟁이 PD 계열의 주요 관심사였다.
두 노선은 치열하게 충돌했다. 대학 총학생회 선거, 학회 운영, 시위 노선, 유인물 문구, 노동현장 진출 방식까지 곳곳에서 경쟁이 벌어졌다.
NL은 PD를 현실의 민족 문제를 보지 못하는 추상적 계급론이라고 비판했고, PD는 NL을 민족주의에 매몰된 비과학적 노선이라고 공격했다. 1980년대 후반 대학가는 단순한 반정부 운동의 공간이 아니라 좌파 내부 노선 경쟁의 실험장이었다.
그러나 북한 문제로 들어가면 양측의 차이는 급격히 흐려진다. NL은 북한을 민족해방운동의 한 축으로 보거나 적어도 공개 비판을 자제하는 태도를 보였다. 북한의 김일성 일인체제, 세습 구조, 정치범수용소, 주민 통제, 사상 검열 문제는 운동권 내부의 핵심 의제가 되지 못했다. PD는 북한의 주체사상을 그대로 수용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북한 체제를 자유민주주의와 인권의 기준에서 정면으로 비판한 것도 아니었다. 이들의 관심은 주로 대한민국의 국가권력, 자본주의, 재벌 구조, 노동 착취 문제에 집중되어 있었다.
1987년은 이 흐름이 대중적으로 확산된 해였다. 1월14일 서울대생 박종철이 경찰의 고문 끝에 사망했고, 6월9일 연세대생 이한열이 시위 도중 최루탄에 맞아 중태에 빠진 뒤 7월5일 사망했다.
이 사건들은 전국적 시위를 촉발했고, 정부는 6월29일 대통령 직선제를 수용하는 6·29 선언을 발표했다. 이어 7월부터 9월까지 노동자대투쟁이 전개되었다. 정부 통계로도 이 시기 노동쟁의는 3000건을 넘었고, 수많은 신규 노동조합이 결성되었다. 학생운동 출신 활동가들은 노동현장으로 들어갔고, 대학가의 이념 논쟁은 노동운동과 시민운동으로 확산되었다.
1987년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곧 전대협의 출범도 중요한 사건이었다. 전대협은 이후 대학가 운동권의 대표 조직으로 자리 잡았고, 특히 NL 계열의 영향력이 강하게 작용한 조직으로 평가된다.
이 시기 김영환이 필명 ‘강철’로 쓴 것으로 알려진 ‘강철서신’은 NL 계열 확산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문건은 반미·자주·민족해방 노선을 체계적으로 설명하며 여러 대학의 비공개 학습자료로 읽혔다. 훗날 김영환은 북한 체제를 비판하고 북한 인권운동에 참여했지만, 1980년대 당시 이 문건이 운동권에 남긴 영향은 작지 않았다.
1989년 임수경의 평양 방문은 북한 문제를 둘러싼 논쟁을 전국적으로 확산시켰다. 임수경은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하기 위해 정부 승인 없이 평양을 방문했고, 귀국 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처벌받았다.
이 사건은 학생운동과 북한의 관계를 한국 사회 전체의 쟁점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운동권 내부에서 북한 체제의 실상을 본격적으로 검증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상당수 운동권은 이를 반통일 세력의 탄압 문제로 해석했다.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와 1991년 소련 해체는 PD 계열에 큰 충격을 주었다. 현실 사회주의가 무너졌다는 사실은 사회주의 혁명론 전체를 재검토하게 만들었다. 일부는 사회민주주의나 진보정당 운동으로 이동했고, 일부는 노동운동에 남았다. NL 역시 국제정세 변화의 영향을 받았지만, 반미·자주·통일을 중심에 둔 노선은 상당 기간 유지되었다.
1980년대 NL과 PD의 분화는 단순한 조직 분열이 아니었다. 그것은 한국 좌파 운동의 장기적 계보를 만든 사건이었다. 하나는 민족을 앞세웠고, 다른 하나는 계급을 앞세웠다. 그러나 두 노선 모두 북한 체제의 민주성, 인권, 세습 문제를 핵심 의제로 삼지 않았다.
결국 당시 운동권의 노선 경쟁은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의 선택이 아니라, 서로 다른 좌파 혁명 노선 사이의 경쟁이었다. 바로 이 점이 1980년대 학생운동을 평가할 때 반드시 짚어야 할 한계다.

◆ 松山 정광제
시인이자 역사·철학 연구자. 전 이승만학당 이사. 현 한국근현대사연구회 연구고문이자 철학 포럼 리케이온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시집 네 권을 출간했고, ‘후크고지의 영웅들’을 공동 번역했으며 인문서 ‘신화가 된 조선’ ‘다다미 위의 인문학’ ‘자유주의자의 그람시 읽기’를 펴냈다. 松山(송산)은 필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