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치기 소년과 늑대. 과장된 위기 경고는 신뢰상실로 이어진다. 한미일보 그래픽
한·미 회담을 마친 뒤 이재명 정권은 ‘성공적 협상’이라며 자화자찬을 이어갔다. 그러나 대통령이 로이터와의 인터뷰에서 직접 밝힌 발언은 이 같은 주장을 정면으로 뒤집었다.
하지만 이재명 대통령은 대국민 사과는커녕 ‘현금출자 강요’라는 레토릭으로 협상의 책임을 피하려 하고 있다.
그렇다면 대통령이 말한 ‘현금출자 강요’는 사실일까? 본 팩트체크는 그 주장 역시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한다.
이재명 대통령은 인터뷰에서 통역을 통해 “통화 스와프 없이 미국이 요구하는 대로 3,500억 달러를 인출해 미국에 현금으로 투자한다면 한국은 1997년 금융 위기 때와 같은 상황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미국이 막대한 현금 납입을 전제로 협상을 압박하고 있다며 국민적 경각심을 환기시켰다.
그러나 미국 측 발언과 이미 체결된 미·일 협상 문건을 종합하면, 구조는 대통령이 경고한 단순 현금출자와는 다르다.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장관은 CNBC 인터뷰에서 “우리가 프로젝트를 지정하면 그들이 돈을 낸다(We give them the project & they pay for the project)”고 말했다.
이는 거액을 한 번에 내는 방식이 아니라, 프로젝트 지정 때마다 일정 기한 내에 납입하는 ‘캐피털 콜(capital call)’ 구조임을 보여준다. 일본이 지난 7월 미국과 맺은 5,500억 달러 투자 양해각서 역시 같은 틀로 설계됐다.
문제는 한국과 일본의 여건 차이다. 일본은 외환보유액 1조 2천억 달러, 국제 기축통화인 엔화, 미국과의 무제한 통화스와프라는 안전판을 지니고 있다. 반면 한국은 외환보유액이 4,200억 달러에 그치고, 원화는 비기축통화이며 무제한 스와프 성사 가능성도 낮다.
따라서 한국이 같은 구조로 투자 약정을 맺더라도 사실상 현금출자에 준하는 압박으로 다가올 수 있다. 이 대통령의 ‘외환위기 재연’ 발언은 바로 이 불리한 조건을 정치적으로 강조한 셈이다.
하지만 실제 협상에서 중요한 것은 투자 총액이 아니라 세부 조항이다.
일본의 경우 프로젝트 지정 후 납입 기한이 4개월로 설정돼 있고, 자금 조달 방식(현금·차입·보증 허용 여부), 수익 배분 구조(원금 회수 전 50:50, 이후 미국 90%·일본 10%), 거부권과 제재 조항, 실패 시 손실 부담까지 조율됐다. 이재명 대통령이 언급한 “상업적 합리성을 보장하는 세부 합의”라는 표현은 바로 이런 디테일을 뜻한다.
한국이 제안한 무제한 통화스와프는 실현 가능성이 거의 없다. 미국은 지금까지 무제한 스와프를 유럽중앙은행, 일본은행, 영란은행 등 기축통화국에만 제공해왔다. 실제로 2020년 코로나19 금융위기 당시 한·미 스와프도 600억 달러 한시적 조치에 불과했다.
전문가들은 한국이 조건부 스와프나 FIMA 레포(외국 중앙은행이 보유한 미국 국채를 연준에 맡기고 단기 달러를 빌려오는 제도) 같은 현실적인 대안을 병행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분할 납입이나 보증 방식 허용 같은 장치도 외환시장 충격을 완화할 카드다.
익명을 요구한 국제 금융 전문가는 “미국은 현금출자를 원한 게 아니라 캐피털 콜 구조를 선호한다”며 “한국은 자금조달 유연성을 확보하는 쪽에 협상력을 집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FIMA 레포와 같은 제도를 적극 활용하고, 조건부 스와프와 분할 납입 장치를 병행해야 외환시장 충격을 최소화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결국 이번 협상의 본질은 단순히 돈을 얼마나 내느냐가 아니다. ‘언제, 어떤 방식으로, 누구 권한에 의해 집행할 것인가’라는 세부 조건이 한국 경제의 성패를 가른다.
이 대통령의 ‘외환위기’ 경고는 정치적으로 위기감을 높이는 효과는 있지만, 외교 협상에서는 과도한 액션으로 비칠 수 있다.
특히 이러한 메시지가 반미 감정을 자극해 협상 주도권을 쥐려는 정치적 의도로 읽힌다면, 외교적으로는 더 위험하다. 감정적 대립이 심화될 경우 한국은 실질적 이익을 확보하기보다 불필요한 비용을 치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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