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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신의 시대] ⑪ 기록되지 않은 민주주의
  • 김영 기자
  • 등록 2026-01-30 16: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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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자도생은 혼란이 아니라 적응이다
  • 선택은 있었지만 이유는 남지 않았다
  • 민주주의는 기록되지 않을 때 기능을 잃는다
각자도생 사회는 혼란의 사회가 아니다. 그것은 공동의 판단과 책임이 사라진 상태다. 본 시리즈는 ‘신뢰 회복’을 말하지 않는다. 불신이 전제가 된 조건에서도 사회가 작동하기 위한 최소한의 구조를 묻는다. 그 조건으로 우리는 판단과 책임의 경로가 남는 구조화된 기록을 제시한다.〈편집자 주〉


Ⅲ부. 불신 이후의 사회 (11~15편)

각자도생 사회 이후, 무엇이 남는가

 

<목차>

 

⑪ 기록되지 않은 민주주의

⑫ 책임 없는 기록

⑬ 학습하지 못하는 사회

⑭ 기록을 대신한 판단, AI

⑮ 구조화된 기록만이 선택을 남긴다

 

각자도생 사회는 무너진 사회가 아니다. 오히려 비교적 안정적으로 작동한다. 


제도는 유지되고, 선거는 치러지며, 규칙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러나 이 안정은 민주주의의 성숙이 아니라, 기대가 낮아진 상태에서 유지되는 균형일 수 있다. 

 

민주주의는 흔히 참여와 절차로 설명된다. 투표가 있고, 대표가 선출되며, 법적 형식이 유지되면 민주주의는 작동한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이 설명에는 결정적인 요소 하나가 빠져 있다. 민주주의가 기능하기 위해서는 선택의 이유가 기록으로 남아야 한다는 점이다.

 

각자도생 사회에서 선택은 사라지지 않는다. 


개인도, 제도도 끊임없이 선택을 한다. 문제는 그 선택의 기준과 대안, 그리고 책임의 위치가 서로 연결된 형태로 남지 않는다는 데 있다. 


결과는 기록되지만, 판단의 경로는 사라진다.

 

이때 민주주의는 공격받지 않는다. 오히려 자연스럽게 소모된다. 누가 무엇을 선택했고, 왜 그렇게 결정했는지를 사후에 복원할 수 없을 때, 민주주의는 설명되지 않은 결과만 남긴 채 다음 국면으로 넘어간다. 


실패는 있었지만, 실패의 이유는 합의되지 않는다.

 

각자도생은 공동체의 붕괴가 아니다. 그것은 판단의 비공식화다. 


공적 판단은 형식적으로 존재하지만, 실제 기준은 개인의 계산 속으로 이동한다. 사회는 결과를 관리하지만, 판단을 공유하지 않는다.

 

이 구조에서 정치적 갈등은 줄어들지 않는다. 다만 성격이 바뀐다. 


무엇을 선택했는지를 놓고 다투기보다, 발언의 의미와 의도를 해석하는 논쟁이 늘어난다. 선택의 기록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기록되지 않은 민주주의의 가장 큰 특징은 조용함이다. 분노는 분산되고, 책임은 흐려지며, 수정의 압력은 약해진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공적으로 규정할 수 없기 때문에, 사회는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지 못한다.

 

이 상태에서 시민은 더 이상 믿는 주체가 아니다. 설득에 응답하는 존재도 아니다. 


대신 각자의 위험을 관리하는 계산자가 된다. 불신은 태도가 아니라 합리적 대응이 된다.

 

민주주의가 끝나는 방식은 쿠데타나 노골적인 독재만이 아니다. 


더 흔한 방식은 판단이 기록되지 않는 상태가 지속되는 것이다. 선택은 반복되지만, 그 선택이 왜 내려졌는지는 남지 않는다. 


민주주의는 유지되지만, 학습 능력을 잃는다.

 

각자도생 사회는 그래서 가장 조용한 방식으로 민주주의를 끝낸다. 


폭력이 아니라 무기록 상태를 통해서다. 민주주의는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기능을 상실한다.

 

민주주의는 절차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선택의 이유가 기록되지 않을 때, 민주주의는 가장 조용한 방식으로 기능을 잃는다.

 

다음 편(⑫ 책임 없는 기록)에서는 기록은 남아 있지만 책임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사회, 즉 ‘책임 없는 기록’의 구조를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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