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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세계와 사상’ ⑤피해자 위치에 서면 도덕적 판단은 유보된다 [특별기고: 松山]
  • 松山 시인
  • 등록 2026-02-25 19:3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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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속지 않으려면 “어떤 질문이 사라졌는가”를 따라가라

넷플릭스 시리즈로 만들어진 ‘서부 전선 이상 없다’. [사진=넷플릭스] 

문학에서 인물은 단순히 등장하지 않는다. 작가는 독자가 어디에 서서 이야기를 바라볼 것인지 미리 정해 둔다. 그 자리 가운데 가장 강력한 위치가 바로 ‘피해자’다. 

 

피해자는 고통을 겪은 인물이다. 고통은 독자의 판단을 멈추게 하는 힘을 가진다. 고통을 겪는 자 앞에서 우리는 먼저 연민을 느낀다. 연민은 빠르고, 논증은 느리다. 이 시간 차이가 도덕적 우위를 만든다.

 

1. 도덕적 우위의 선점 방식

 

예를 들어 ‘소년이 온다’에서 작가는 1980년 광주의 한 소년의 죽음을 중심에 둔다. 독자는 시신을 정리하는 장면, 가족의 상실을 따라가며 이야기를 체험한다. 

 

이때 독자는 사건의 정치적 맥락을 먼저 생각하지 않는다. 먼저 느끼는 것은 상실의 무게다. 상실은 판단을 미룬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보다 “이 고통은 얼마나 컸는가”가 앞선다. 피해자의 위치가 이미 도덕적 중심을 점유한 것이다.

 

도덕적 우위는 선언으로 얻어지지 않는다. 배치로 얻어진다. 작가는 피해자를 이야기의 출발점에 둔다. 피해자의 시점, 피해자의 언어, 피해자의 기억을 전면에 놓는다. 

 

그 결과 독자는 자연스럽게 그 시점 안으로 들어간다. 그 안에서 다른 입장은 주변으로 밀린다. 가해자의 설명, 제도적 배경, 국제 정세, 복잡한 정치적 계산은 뒤로 물러난다.

 

역사 소설에서도 같은 방식이 사용된다. 19세기 산업혁명을 다룬 ‘올리버 트위스트’를 떠올려 보자. 찰스 디킨스는 고아 소년을 통해 산업 도시의 빈곤을 묘사했다. 

 

굶주린 아이가 “더 주세요”라고 말하는 장면은 영국 사회의 구조를 설명하는 통계보다 훨씬 강한 설득력을 가졌다. 당연히 독자는 고아의 편에 서게 되고, 산업화의 복잡한 경제 구조는 단순한 잔혹성으로 압축된다.

 

여기서 핵심은 인물의 도덕성 자체가 아니라 배치의 기술이다. 피해자는 설명하지 않아도 정당성을 가진다. 고통을 겪었다는 사실이 이미 방패가 된다. 작가는 이 방패를 활용한다. 

 

피해자를 전면에 두면 독자는 먼저 공감한다. 공감은 판단을 유보하게 만들며, 이 유보 상태에서 작가의 메시지는 저항 없이 스며든다.

 

한국 현대사를 다룬 여러 소설에서 1950년대 전쟁고아, 1970년대 노동자, 1980년대 민주화 운동 참여자가 중심인물로 등장한다. 

 

물론 이 인물들은 역사적 피해자지만, 사실 관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배치가 다른 질문의 허용을 막아버린다는 것이다. 

 

피해자의 고통을 소설의 중심에 두면, 그 운동의 전략이나 내부 갈등, 정치적 오류는 뒷전이 된다. 피해자가 이미 도덕적 우위를 선점하면 그 상태에서 작품이 시작된다.

 

도덕적 우위의 선점은 독자의 심리 구조와 맞물린다. 인간은 약자를 보호하려는 경향이 있다. 진화심리학적으로 보아도 집단 내부의 약자를 보호하는 행위는 공동체 생존에 유리했다. 

 

문학은 이 본능을 건드린다. 피해자는 약자다. 약자를 보호하려는 본능이 작동하면, 우리는 그가 속한 집단이나 사상까지 함께 보호하려 한다.

 

이 과정에서 피해자는 단순한 인물이 아니라 상징이 된다. 한 소년은 한 도시가 되고, 한 노동자는 한 시대가 된다. 상징이 되면 비판은 어려워진다. 상징을 건드리는 행위는 도덕적 금기를 넘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피해자의 위치는 단순한 등장인물의 자리가 아니라 이야기 전체의 도덕적 중심이 된다.

 

문학은 판단을 강요하지 않는다. 대신 자리를 정해 준다. 독자가 어디에 앉아 이야기를 보게 할 것인가. 피해자의 자리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이미 절반의 설득을 마친 상태로 출발한다. 이것이 도덕적 우위의 선점 방식이다.

 

2. 불쌍함이 판단을 이끄는 과정

 

‘불쌍함’의 전달 속도는 ‘이성’을 압도한다. 인간의 뇌는 위기 상황이나 고통의 장면에 즉각 반응한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감정 휴리스틱’이라 부른다. 

 

복잡한 판단을 할 때 우리는 모든 정보를 분석하지 않는다. 대신 빠른 단서를 잡는다. 눈물, 피, 굶주림, 억울함 같은 단서는 즉각적인 결론을 유도한다.

 

예를 들어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을 다룬 문학을 보자. ‘서부 전선 이상 없다’는 전쟁의 참상을 병사의 시선으로 그린다. 참호 속에서 죽어 가는 청년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전쟁의 원인이나 국제정치의 계산은 멀어진다. 

 

독자는 전쟁 그 자체를 비극으로 느낀다. 그 비극은 전쟁을 시작한 정치 지도자들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불쌍함은 개인의 얼굴을 통해 전달된다. 통계는 숫자다. 숫자는 아무리 커도 추상적이다. 그러나 한 아이의 굶주림은 구체적이다. 유니세프 광고가 늘 아이의 얼굴을 보여 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문학도 마찬가지다. 얼굴 없는 1만 명의 희생보다 얼굴 있는 인물 한 명의 죽음이 더 강한 울림을 준다.

 

한국 현대사 소설에서 1970년 전태일의 분신은 자주 언급된다. 전태일의 죽음은 노동 문제를 상징하는 사건이 되었다. “근로기준법을 지켜라”라는 외침은 한 개인의 절규였지만, 문학과 영화는 이를 통해 사회구조 전체를 비판했다. 

 

여기서 독자의 판단은 먼저 불쌍함을 거친다. 불쌍함은 연대 의식으로 이어지고, 연대는 정치적 결론으로 연결된다.

 

이 과정은 세 단계로 진행된다. 첫째, 고통의 구체화다. 작가는 세밀한 묘사로 고통을 눈앞에 펼쳐 보인다. 둘째, 동일시다. 독자는 “저 인물이 나였다면”이라고 상상한다. 셋째, 일반화다. 그 인물의 경험을 사회 전체의 문제로 확장한다. 

 

이 세 단계가 매끄럽게 연결되면, 독자의 판단은 이미 일정 방향으로 기울어진다.

 

문제는 여기서 질문이 줄어든다는 점이다. 불쌍함이 강할수록 복잡한 설명은 자리를 잃는다. 예를 들어 농민 반란을 다룬 소설에서 굶주린 농민의 모습이 전면에 나오면, 그 반란의 전략적 판단이나 폭력의 문제는 상대적으로 약해진다. 

 

독자는 먼저 “저들은 억울했다”고 결론을 내린다. 그 이후의 판단은 이미 형성된 방향을 따라간다.

 

불쌍함은 도덕적 방패가 된다. 불쌍한 자를 비판하는 것은 잔혹한 행위처럼 보인다. 그래서 논쟁은 멈춘다. 이 멈춤이 바로 판단을 이끄는 힘이다.

 

현대 미디어 환경에서도 이 구조는 반복된다. SNS에서 특정 사건의 피해자가 알려지면, 몇 시간 만에 여론이 형성된다. 문학은 이 과정을 느리게, 더 깊게 수행한다. 그러나 구조는 같다. 불쌍함이 먼저 오고, 분석은 나중에 오는 구조다.

 

문학이 이 과정을 의도적으로 활용할 때, 독자의 도덕적 나침반은 이미 조정된 상태가 된다.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이야기 속에서 스스로 판단했다고 생각하면서도 실제로는 배치된 감정의 흐름을 따라간다. 불쌍함은 판단의 출발점이 아니라, 종종 도착점이 된다.

 

3. 질문이 봉쇄되는 서사 구조

 

피해자가 중심에 놓이고, 불쌍함이 판단을 이끌면 다음 단계가 나타난다. 질문의 축소다. 질문이 줄어들면 토론도 줄어든다. 서사는 특정 질문만 허용하고 다른 질문은 암묵적으로 금지한다.

 

예를 들어 특정 독재 정권을 다룬 소설에서 고문 장면이 상세히 묘사된다면, 독자는 그 정권의 폭력성을 먼저 본다. 물론 이는 정당하다. 그러나 동시에 “그 정권이 등장한 배경은 무엇이었는가” “국제 질서 속에서 어떤 위협이 존재했는가” 같은 질문은 뒤로 밀린다. 

 

이런 질문을 던지는 행위 자체가 피해자의 고통을 가볍게 여기는 태도로 오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1984’를 떠올려 보자. 오웰은 전체주의 사회를 극단적으로 묘사했다. 독자는 윈스턴의 고통을 따라가며 체제의 억압을 체험한다. 이 작품은 전체주의의 위험을 경고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피도 네스티가 그래픽 노블로 출간한 ‘1984’. [표지=사계절]

그러나 동시에 체제가 유지되는 사회적 조건이나 대중의 심리는 상대적으로 적게 다뤄진다. 작품의 목적이 경고이기 때문이다. 경고의 서사는 질문을 줄이고 메시지를 강화한다.

 

질문이 봉쇄되는 구조는 다음과 같이 작동한다. 

 

첫째, 도덕적 중심이 고정된다. 피해자가 중심이다. 둘째, 반대 질문은 도덕적 위험을 동반한다. “그들도 잘못이 있었는가”라는 질문은 곧 피해자 비난으로 해석될 수 있다. 셋째, 독자는 안전한 질문만 던진다. 

 

예를 들어 “왜 이런 비극이 반복되는가” 같은 일반적 질문은 허용되지만, 사건의 내부 복잡성을 묻는 질문은 줄어든다.

 

한국 현대사를 다룬 여러 작품에서 이 구조가 나타난다. 민주화 운동을 다룬 소설은 국가 폭력을 고발한다. 이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동시에 운동 내부의 전략적 선택이나 이념적 갈등을 다루는 작품은 상대적으로 적다. 피해자의 고통이 이야기의 중심을 차지하면, 그 내부의 다양성은 뒷전이 된다.

 

이 현상은 특정 진영만의 문제가 아니다. 어느 집단이든 자신을 피해자로 설정하면, 질문을 줄이는 효과를 얻는다. 국제 정치에서도 마찬가지다. 한 국가가 자신을 피해자로 규정하면, 그 국가의 정책에 대한 비판은 도덕적 저항에 부딪힌다.

 

문학은 질문을 봉쇄할 수도 있고, 질문을 확장할 수도 있다. 피해자를 중심에 두면서도 동시에 복잡성을 보여 주는 작품도 있다. 

 

예를 들어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은 살인을 저지른 인물을 단순한 악인으로 두지 않는다. 

 

라스콜니코프는 가난과 고립 속에서 범죄를 저지른다. 독자는 그의 고통을 이해하지만, 범죄의 정당성은 인정하지 않는다. 여기서는 피해자와 가해자 구도가 단순하지 않다. 질문이 열려 있다.

 

질문이 봉쇄되는 서사는 명확하고 강력하다. 그러나 복잡성을 잃는다. 질문이 열려 있는 서사는 불편하다. 그러나 더 깊다.

 

문학은 독자의 판단을 길들이는 힘을 가진다. 피해자의 위치를 어디에 두는가, 불쌍함을 어떻게 묘사하는가, 어떤 질문을 허용하고 어떤 질문을 배제하는가에 따라 독자의 사고 방향이 달라진다.

 

피해자를 존중하는 일과 질문을 유지하는 일은 동시에 가능하다. 문제는 그 균형이다. 피해자의 고통을 인정하면서도, 그 사건을 둘러싼 구조와 선택, 국제 환경, 사상적 갈등을 함께 다루는 서사가 필요하다.

 

피해자의 위치 배치는 문학의 강력한 도구다. 그 도구가 독자를 설득할 수도 있고, 사고를 좁힐 수도 있다. 결국 문학은 인간을 다룬다. 인간은 단순하지 않다. 피해자도 복합적 존재다. 질문을 열어 두는 서사가 인간의 복합성을 더 온전히 드러낸다.

 

문학을 읽는다는 것은 이야기를 따라가는 일이 아니다. 이야기의 배치를 읽는 일이다. △누가 중심에 서 있는가 △누가 말하지 못하는가 △어떤 질문이 사라졌는가. 이 세 가지를 살피는 태도가 있을 때, 우리는 서사에 이끌리면서도 서사에 갇히지 않는다.

 




◆ 松山

 

시인이자 역사·철학 연구자. 전 이승만학당 이사. 현 한국근현대사연구회 연구고문이자 철학 포럼 리케이온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시집 네 권을 출간했고, ‘후크고지의 영웅들’을 공동 번역했으며 역사심리학 해설서 ‘신화가 된 조선’(2026)을 펴냈다. 현재 자유주의 문화운동의 연구와 실천을 활발하게 이어가고 있다. 松山은 필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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